[Opinion]사랑의 시작, 그 설렘은 배를 매는 것에서 시작한다. 장석남 < 배를 매며 > [문학]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글 입력 2015.09.2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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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맞이 묵은 짐들을 정리하다가 고등학교 시절 썼던 다이어리를 우연히 보았습니다. 하루 종일 잠만 자서 자책하는 글, 모두 잘 될 거라는 희망찬 글부터 변비 탈출했다는 소소한 행복(?)의 글까지 읽다가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시’ 한 편이 쓰여 있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 장석남 <배를 매며>



노래 가사에도, 소설에도, 그리고 심지어 시에도. 유독 ‘사랑’이 주제로 많이 등장합니다. 그만큼 ‘사랑’은 모든 인간이 경험하고 이해하는 감정이니까요. 이 시는 사랑이 시작되는 아주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치 ‘배를 매는 것’처럼 말이에요!
 

다운로드.jpg
 

시인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넉 놓고’ 앉아있습니다. 부둣가에 들리지 않았을 수도 있고 잠시 바다를 구경하다가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을 수도 있지만, 아주 우연히, 말이에요. 누군가 찾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털썩’ 하고 등 뒤로 밧줄이 들어옵니다. ‘이게 뭐지?’ 깜짝 놀란 마음에 얼른 가서 배를 맵니다. 이제, 사랑이 시작되는 거죠. 물론 무시하고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밧줄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사랑은 운명적으로, 필연적으로, 나도 모르는 새에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되고, 우리는 그 사랑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거죠. 사랑이 인생 어느 타이밍에 오든, 심지어 우리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시기에도, 우리는 그저 사랑 앞에 온 몸을 맡기게 됩니다. 우리가 놀라지 않도록 사랑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다가올테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막상 배를 매고 보니, 바다에 비친 뭉게구름도 따스한 햇살도 그리고 배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이 시간도 너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 뿐 아니라 그 사람 주변의 공기, 소리, 향기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 그렇게 마음 한 구석이 울렁울렁 거리는 설렘을 가지고 사랑은, 시작됩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우연히 찾아오는 사랑을 우리가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과 그 주변의 모든 것까지 사랑하게 되는 우리의 모습을 어쩌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지! 이 시를 제 다이어리에 쓸 무렵에, 제가 열렬히 짝사랑하던 선생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 시처럼 지금도 언제 그 선생님을 좋아하게 된 건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매 수업시간마다 설레고 행복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고생이 사랑에 대해 뭘 안다고 다이어리에 끄적였을까, 싶어 귀엽기도 하고 조금은 웃기기도 하지만, 시인의 말처럼 사랑은 털썩! 오는 거니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부둣가에 앉아있는 연인에게는 사랑의 시작의 달콤함을,
이제 막 배를 매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사랑의 시작의 설렘을,
아직 호젓한 부둣가에서 밧줄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사랑의 시작의 기대감을 주는 
장석남의 <배를 매며>, 함께 읽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사진 출처>




[유다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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