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절망에서 피어난 천재 화가, 프리다 칼로 전

글 입력 2015.06.3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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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피어난 천재 화가라는 극찬을 받는 프리다 칼로.
아트인사이트(www.artinsight.co.kr)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작품과 세계를 만나볼 수 있었다.
 
 
 
 
 
프리다 칼로 웹전단 (2015.06.11).jpg
 
 
 
 
 
예술을 감상하는 데 필요한 건 사실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멕시코 당대 상황과 맥락을 이해한다면, 프리다 칼로 전을 보다 깊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멕시코는 16세기부터 스페인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여 300여 년 간 착취당했다. 이는 일제치하 36년의 세월을 경험한 우리나라의 시간에 10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1910년, 독립운동(1810) 발발 100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독재를 바탕으로 유산계급에게만 특혜를 부여했던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에 대항하여 시민혁명이 발발한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국 가운데, 대다수의 국민들은 문맹이었다. 교육을 받을 여건도 되지 않았을 뿐더러 식민지인들은 그저 착취의 대상으로 간주되기만 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20년에 시국이 안정되면서 등장한 대통령 오브레곤이, 문맹인 국민들을 감안하여
민족 문화 확립과 멕시코 정체성 재발견을 기치로 내세워 예술가들로 하여금 벽화를 통해 문맹인들을 교화하게끔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멕시코의 벽화운동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프리다 칼로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는 바로 이 벽화운동의 핵심인물이자 혁명가였으며
프리다는 벽화를 그리던 디에고를 만나 존경심을 품고 또 운명같은 사랑에 빠져들게 된 셈이다.
 
 
 
유사하게 식민경험이 있으나, 멕시코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i) 문맹률이 높았고, ii) 벽화(예술)가 민중운동의 중요한 매개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상이한 점들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을 파악하고 보면, 왜 프리다 칼로가 혁명을 계속 부르짖었는지
그리고 자신을 힘들게 함에도 불구하고 디에고를 완전히 떠나지 못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초현실주의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녀는 "나는 결코 꿈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난 나의 현실을 그린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작품을 보면 하나같이 우울함이 묻어났다.
디에고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전차사고로 인해 육체적인 고통이 극심한 상황이었고
디에고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 역시 크게 받았던 그녀로서는
지친 자신의 현실을 달래줄 유일한 창구가 그림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그녀의 자화상들을 보면, 가슴 아프게도 그녀가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운명같은 사랑을 하면서 행복한 순간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채플린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그녀의 삶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세밀하게 담아냈을 그녀의 그림을 보면 그녀의 인생은 기쁜 순간보다 슬픈 순간들이 더 많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전시실이었던가.
전시를 보다 마지막 출구 쪽 벽에 보면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가 각각 한 말이 프린트되어 있다.
칼로는 "나는 디에고를 내 남편이라고 말해 본 적이 없다. 그 단어를 그에게 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는 한 번도 어느 누구의 남편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디에고는, 자신은 여성을 사랑하게 될 수로 그 여자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프리다 칼로가 그 만행의 가장 극심한 피해자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들의 삶과 사랑은, 이미 아득한 후대인 내가 보기엔 비극 소설의 한 편 같았다. 그것이 현실이었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플 정도로.
 
 
 
 
칼로옷1.jpg
 
(프리다 칼로가 입었던 옷을 복원한 모형1)
 
 
 
칼로옷2.jpg
 
(프리다 칼로가 입었던 옷을 복원한 모형2)
​프리다 칼로는 위와 같이 아름다운 멕시코 전통 옷을 입으며 살았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이상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자신의 삶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었다.
오히려 시대적인 이데올로기적 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작품들을 그려냈기 때문일까, 그녀의 작품들은 진정 그녀의 내면세계를 유추할 수 있게 오로지 칼로 자신에게 침잠되어 있는 듯했다.​
그렇기에 후대의 감상자로서, 그리고 같은 여성으로서 나는 그녀의 삶에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
알량한 말로는 감히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기분.
 
 
 
칼로죽음.jpg
 
(관 속에 뉘인 프리다 칼로와 그녀를 바라보는 디에고 리베라)
칼로가 죽은 뒤에야,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잘했던 일이 프리다를 사랑했던 것이라 고백한 디에고 리베라.
그의 작품들은 현재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 중이다.
참으로 기묘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 동시에 남편과 부인의 작품이 전시된다니
그들의 운명만큼이나 기묘한 것 같다.
아마도 디에고 리베라의 전시회를 본다면 멕시코의 시대적 맥락을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칼로표.jpg
 
 
 
프리다 칼로 전을 보고 나니, 감히 내 언어로 그녀의 삶을 표현하자면 그녀는 연꽃같은 삶을 살다 떠난 것 같다.
진흙같이 질척하고 어둡고 암울하기만 한 현실에서
그녀는 악착같이 자신의 꽃을 피워냈다.
그것은 비단 그녀가 살았던 당시에만 찬란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장미와 가시 같은 삶을 살았던 프리다 칼로.
물론 좀 더 다양하게, 프리다 칼로의 작품 자체를 살펴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칼로 전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있지만, 칼로의 작품 자체보다는 사실 그 배경에 대한 설명과, 칼로와 리베라의 사진 등이 더 부각되는 느낌이어서 아쉬운 점도 있었다. 칼로의 작품이 더 많기를 바랐다.)
겔만 부부가 자력으로 수집한 칼로와 리베라 및 다른 멕시코 작가들의 작품이 이만큼이나 된다는 것 자체에 한편으로는 놀라기도 했다.
칼로의 삶을 반추하면서 나의 인생도 성찰할 수 있는 기회였다.
시간이 된다면 디에고 리베라의 전시회도 다녀와야겠다.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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