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불 < 태양의 도시 Ⅱ(Civitas Solis Ⅱ) >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시각예술]

글 입력 2015.06.22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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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및 어린이는 전시장 입구에서만 관람이 가능합니다.”


어쩌면 억울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전시실들과는 달리 기다랗게 줄을 서야했던 이곳에서 더 이상 들어가지도, 뒤돌아 나가지도 못 한 채 문 앞을 서성이던 몇몇 어린이들이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뿌옇게 변해가는 전시장 너머를 바라보기만 했던 어린이들. 그렇게 모든 것이 처음인 것 마냥, 그 눈을 빌려 전시장을 걷고 싶었다. 그 때 누군가 작품 제목을 중얼거리는가 싶었지만, 몇 분 뒤 마주하게 될 그 무엇에 대해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멍하게 들어갈 순서를 기다렸다.


이미 오래 전 저명해진 작가지만 ‘이불’이라는 이름은 또 다시 새롭게 다가왔다. 포근포근한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작품들을 보노라면 더욱 그러했다. 이번 전시에서도 충분히 ‘포근하지 않은’ 작품이 두 눈에 잠겼다. 뒤에서 조잘대는 어린이들을 뒤로 하고, 그를 만나러 거대한 전시실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곳에선 거울로 둘러싸인 벽들이 스스로 공간을 무한하게 확장하고 있었다. 발아래에도 내 얼굴이 있었고, 그 옆에도 하나 더, 그리고 그 위에는 몇 십 개의 얼굴이 떠다녔다. 길이 33m, 폭 18m, 높이 7m라고 명시된 대형 전시실이었지만 그보다도 몇 배는 큰 하나의 도시처럼 보였다. 어디로 걸어가야 하는지조차 감이 오지 않던 처음의 인상에 순간적으로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투명해서 금방이라도 힘없이 무너질 것만 같은 플라스틱 컵들, 그리고 그 위의 거울 조각들. 발이 거울의 도시 골목골목에 닿을 때마다 내가 이곳의 일부분을 자칫하면 밟아버릴까, 그 때문에 무한 확장하던 도시가 갑작스럽게 멈추어 버릴까봐 두렵기도 했다. 나의 얼굴, 우리의 몸, 모든 관람객들의 시선을 끝없이 펼쳐나가던 ‘멋진’ 도시였지만, 넓은 공간이 만들어낸 더 넓은 공간성이 한 번의 실수로 파멸되지 않기를 바라며 숨죽이고 걸어야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배반감이 들 지경이었다. 바로 그 때, 가장 머나먼 곳에서 전구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칠흑같이 어두컴컴하지는 않더라도 안개 가득히 뿌옇게 변해버린 전시장이었기에 그 신호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모두의 시각적 침묵을 깨버렸다. 한 치 앞도 확연하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명멸하는 빛이었고, 조각나고 깨져버린 유리 사이에서의 생존 신호였던 것이다. 이 도시의 비밀스러운 공간을 열어젖힌 느낌이 들던 순간, 발광하는 모든 것의 강렬한 비명이 들렸다. 천천히 걸으며 구석구석의 거울에 비친 숱한 스스로를 마주하다 마침내 마지막 거울 조각을 직면했을 때까지도, 그 비명은 멈추지 않았다. 플라스틱 컵들이 툭 건드리면 허무하게 무너질 모래성 더미마냥 뒤집어져 있었더라도, 유리세계가 우리의 모습을 거짓으로 홀렸더라도 그 안에서 나는 차원을 뛰어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모순을 안은 ‘태양의 도시’


한바탕 꿈같았던 곳에서 한 발짝 걸어 나와 그제서야 작품의 제목을 읽어보았다. 태양의 도시, CIVITAS SOLIS라고 쓰여 있었다. 이전에 전구더미들이 소리치던 그 글자를 늦게나마 깨달았다. 불규칙하게 점멸을 반복하던, 그래서 더욱 감당하기 힘든 불안감을 자아내던 불구덩이 속 전구들은 태양의 도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 강렬한 이미지에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태양이 같은 곳에서 빛을 비추어주는 동시에 모든 것을 파괴시켜버릴 수 있는 열기를 뿜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시장 밖에서 돌이켜본 그 공간은 정적이기도 했으며 끝없이 동적이었다. 거울 속에서 분절된 이미지들과 불규칙적으로 갈라진 파편들의 선은 고요함 속에 묻혀있던 외침의 복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전시장 안에 들어서기 전에는 조용한 공간 속에서 빛나는 반사광만이 관람객들을 반기지만 걸음을 내딛을수록 먼 곳에서 강렬하게 빛나는 발광다이오드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모순적인 울림에, 모두의 입에서 감탄의 외마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한참을 고민해보아야 했다. 왜 그 안에서 셀 수 없이 가득한 나의 얼굴을 보아야 했고 발 치의 유리 사이를 조심스럽게 건넜어야 했으며, 마지막에는 왜 눈이 부실만큼의 인상을 느꼈어야 했는지에 대한 숱한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결국 작가의 거대한 서사 속에서 여행객이던 내가 이국적인 어느 땅을, 말하자면 우주 어느 행성의 작은 도시를 탐방하고 나의 공간에 비로소 안착했음을 깨달았다. 그 안에서 사실 나는 감각을 통제할 수 없었던 데다가 인식의 범주를 넘어선 낯선 환경에 맞부딪혀 마음 속 깊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영겁의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돌아온 기분에 사로잡히고, 얼마 있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안에서의 일에 경외심을 품게 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억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도시를 아직은 여행하지 못한 어린이들 이외에도, 작가와 비슷한 자신만의 세계를 보여주려 했던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억울해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 책과 영화를 통해 상상의 한 조각을 채워주었던, 그래서 모두에게 낯익은 이 세계가 한없이 멋진 이유는 이불이라는 작가만의 이상도시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젠 눈을 가득 적시던 부드러운 반사광을,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맑았던 전구더미의 이야기들을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불의 뉴런에 짧은 여행을 다녀온 나는 그녀가 직접 빛으로 빚은 모순과 무한의 도시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어 기쁠 뿐이다. 그 어떤 작품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경험을 다시 선사해주겠는가. 미술관을 나와 집에 돌아가는 길은 괜스레 특별했다.


  

[전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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