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수. 억수는 해바라기슈퍼 앞에 살고 있던 개다. 해바라기슈퍼는 최현주 작가가 살던 길목의 조그만 구멍가게 이름이다. 어느 날 부터인가 억수가 보이지 않자 주인 할아버지에게 억수의 행방을 여쭈었다. 억수는 그만 교통사고로 죽고 억수의 새끼 강아지인 돌돌이만 혼자 남겨졌다. 그리고 억수는 사실 억순이 라는 이름의 암캐였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바라기슈퍼 자리에는 구멍가게 대신 씨엔유가 자리 잡았다.
최현주 작가는 서울 도시풍경 한켠에 포함된 억수 또는 억순이라고 불렸던 개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전봇대와 골목길 일대로 개 한 두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풍경은 21세기 도시계획에는 포함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포유류 중 가장 오래된 가축이며 인간의 가장 가까운 반려동물은 거리에서 모습을 감추고 집 안으로 숨어들었다. 작가는 이런 억수로부터 자신의 상태와 유사한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라지거나 잊혀져가는 현상에 대한 의미를 단순히 지나치지 말자는 의지는 ‘억수'로부터 ‘오수’라는 캐릭터의 원형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수I _acrylic on canvas_30X40cm_2015
잠수부 _acrylic on canvas_30X40cm_2015
배트맨 _acrylic on canvas_30X40cm_2015
여러 접점을 거쳐 탄생한 ‘오수’라는 캐릭터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인간 같아 보이기도 하고 곰 같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가 곰과 유사하다고 느끼는 지점은 실제의 곰을 자주 접하고 관찰하여 생각되는 닮음이 아닌, 자연의 상징물로 쓰인 곰과 닮아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곰돌이 푸우, 테디베어, 리락쿠마 등등이 있겠다. 이러한 강력한 캐릭터들은 우리가 곰을 인지하는데 가장 구체적이고 일차적인 단서로 작용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오수'는 현재는 퇴색되어가고 있는 ‘신화적 사고’에 더 가깝게 기인하고 있다. 단군설화의 일부분인 웅녀설화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왔다. 오늘날의 사고체계로는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들이지만 최현주 작가는 퇴색되는 한국 토테미즘에서 21세기 회화의 모티브로서 ‘오수’를 소환한다. 해바라기슈퍼의 ‘억수’와 웅녀는 작금의 시대에서 잊혀지거나 가려진 즉, 주목받는 요소에서 비켜나간 존재를 지칭하고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오수’ 또한 동물을 모방한 캐릭터라는 숙명에서 자유롭지 않다. 즉 캐릭터로써 소모되고 사랑받아야 하는 것이 ‘오수’ 최초의 생존방식으로 결정 지어졌다.

오수II _acrylic on canvas_96.5x100cm_2015


<궤도이탈>에서 우주를 떠도는 ‘오수’를 보고 있자니 ‘프란시스 고야’의 <개>가 떠오른다. 검은 언덕 혹은 황량한 사막에서 개 한마리가 힘겹게 머리만 내밀고 있는 그림이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고 침묵과 텅 빈 공간만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이러한 삭막한 공간에 혼자 남겨진 개 한 마리는 어쩌면 지구의 마지막 생명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고 난 후의 죽음은 새로운 탄생을 위해 거쳐야 하는 순환 고리의 전단계라고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우주에서 떠도는 ‘오수’의 운명은 회화속이라는 장소에서 제2의 언어와 삶으로 재창조되고 있는 중이다.
전시를 보며 환상과 이상을 넘나 드는 게 가능하도록 창조된 캐릭터조차 현실의 냉혹함을 벗어날 수 없음은 최현주 작가의 ‘오수’를 보며 느낄 수 있다. ‘오수’가 갈아입는 다양한 옷과 표정들은 우리가 생존해내야 하는 시공간에서 역할과 변화에 맞는 일종의 코스프레를 하는 자신을 보게 한다.
우리의 삶은 디즈니와 픽사 속의 알록달록한 환상이 펼쳐지는 세계가 아님을 안다. 스크린에서의 영상이 끝나면, 거친 현실세계로 진입하여야 하고 ‘오수’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현실세계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나가야 한다. 작가는 동화적인 캐릭터로 현실의 차가움을 담담하고 냉담하게 보여준다. 이는 최현주 작가가 느끼는 세계이고, 우리가 느끼는 세계이고, 현실이라고 쓰이는 삶의 풍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