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10주기를 맞은 체홉 다시 읽기 [문학]

글 입력 2015.04.0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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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홉은 19세기 말 러시아의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셰익스피어는 시고 체홉은 에세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희극은 일상성이 강하고 인간 내면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체홉으로부터 시작된 현대 연기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다시 말해 작품 속 캐릭터가 하는 행동과 말은 모두 숨겨진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마치 우리의 일상과 비슷하다. 현실에서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말이나 행동은 단순히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의도를 품고있다. 따라서 체홉의 독자들은 겉으로만 드러나는 것 이외에 그 속에 담긴 복잡한 뜻을 상상하고 이야기를 재구성해야한다. 그럴수록 작품은 더욱 사실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작품이 무대에 올라섰을 경우, 이 과정은 배우를 통해 이루어진다. 배우들이 얼마만큼 상상했고 재구성했느냐에 따라 극 내부에 존재하는 의미가 달라지고, 관객이 캐릭터에게서 읽어낼 수 있는 감정의 폭도 달라진다. 

올해에는 그의 서거 110주년를 맞아 ‘체홉 다시 읽기’가 다방면에서 진행되고있다. 특히 대표작 [갈매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재해석 되는 작품이다. [갈매기]는 1896년에 발표된 사실주의 희곡으로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과연 [갈매기]에서 캐릭터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체홉은 이를 어떻게 숨김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독자와 배우들의 상상으로 어떤 새로운 내용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갈매기]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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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사건들은 소린의 저택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누이인 아르까디나는 연극 배우로 자신의 아들 뜨레쁠레프와 연인인 유명한 소설가 뜨리고린과 함께 저택에 머물게 된다. 작가가 꿈인 뜨레쁠레프는 저택에 마련된 무대에서 창작극을 공연한다. 그는 작품 속 배우인 니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아무도 연극을 이해하지 못했고, 극은 도중에 멈춰버린다. 연극을 이해하고자 했던 사람은 마샤뿐이다. 그녀는 뜨레쁠레프를 사랑하지만 고백도 못한 채 지켜보고만 있다.

며칠 뒤 뜨레쁠레프는 니나에게 죽은 갈매기가 자신과 같다며 곧 자살할 것이라 이야기한다. 니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뜨리고린을 사랑하게 된다. 뜨리고린도 니나에게 욕망을 느끼지만 아르까지나와 함께 모스크바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2년 뒤, 소린은 죽기 전에 누이를 저택으로 불러들인다. 마샤는 사랑하지도 않는 메드베젠꼬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지만 행복하지 않다. 그 사이 니나는 집을 떠나 뜨리고린과 사랑을 나누고 아이가 태어나지만 곧 죽는다. 결국 뜨리고린의 사랑은 식어 다시 아르까지나에게 돌아간다. 시간이 지나 소린의 저택에서 다시 갑자기 마주친 니나에게 트레쁠레프는 자신의 인생을 바치며 사랑할 것이라 이야기하지만 니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뜨레쁠레프는 니나가 떠난 후 자살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갈매기 [Чайка]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러시아문학, 2013.11, 인문과교양)


위의 줄거리는 관객이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극의 내용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체홉의 작품은 상상하기조차 벅찬 감정을 단순한 텍스트 뒤에 숨겨둔 사실주의를 표방한다. 작품의 대사 한 줄 한 줄과 지문 하나 하나마다 보이지 않는 의미가 감춰져있다. 총 4막으로 구성된 [갈매기] 중 1막을 중심으로 나름대로의 상상을 도입한 우리들만의 재해석을 해보도록 하자.


1막 


소린 영지 내에 있는 정원의 일부 … 지금 막 해가 졌다. 커튼으로 덮여 있는 무대에 야꼬프와 다른 일꾼들. 기침 소리와 망치 소리가 들린다.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마샤와 메드벤제꼬가 왼쪽에서 등장.

메드베젠꼬 : 당신은 왜 항상 검은 옷만 입고 있어요?

마샤 : 이건 제 인생의 상복이에요. 전 불행하니까요.

메드베젠꼬 : 왜죠? 이해가 안 돼요. … 당신은 건강하고, 당신 아버님은 부자는 아니시지만 생활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만큼 버시잖아요. 당신에 비하면, 전 훨씬 더 어렵게 삽니다. … 그래도 전 상복은 안 입습니다.

마샤 : 문제는 돈이 아녜요. 가난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어요.


해가 지고 있는 시간적 배경은 빛이 사라져가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이후 극에서 그려질 사랑하는 사람들의 떠나가는 모습을 암시한다. 공간적 배경은 시골 정원으로 매우 자연적이다. 하지만 들리는 소리는 인위적인 망치와 기침 소리이다. 과연 이 소리는 주인공들에게는 어떻게 들릴까? 같은 소리더라도 사람들에게는 모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누구에게 망치 소리는 소음일 수도, 혹은 작업 소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샤에게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뜨레쁠레프의 무대를 설치하는 소리, 자신을 이끄는 유혹의 음성으로 들린다. 그녀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시선이 가고, 발걸음이 옮겨진다. 아마 마샤는 무대에 등장함과 동시에 혹시나 뜨레쁠레프가 있을까 남몰래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없고, 마샤는 크게 실망한다.

그녀의 옆에는 메드베젠꼬가 있다. 그는 마샤를 사랑하기에 그녀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에 반응한다. 마샤의 얼굴에서 그는 실망감을 발견하고, 그녀가 입고있던 검정색 옷 조차 슬퍼보인다. 그가 걱정의 말을 던지자 마샤는 그것이 인생의 상복, 불행이라고 말하며 가난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가 무엇인지, 무엇으로 가난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저 상투적인 관점에서 텍스트의 표면적 의미만 도출해낸다면 마샤는 필요 이상으로 우울한 캐릭터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보고 싶어하는 이를 못보고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는 마음에 우울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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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레쁠레프 : 어머닌 절 사랑하지 않아요. 당연하죠! ... 제가 없으면 어머니 서른 두 살이시지만, 제가 앞에 있으면 마흔 셋이 되시니, 절 미워하실 수밖에요. 

...

뜨레쁠레프 : (귀를 기울인다) 발소리가 들려요...(삼촌을 껴안는다) 전 니나 없이 살 수 없어요 … 그녀의 발소리조차 아름다워요전 행복해요, 너무나 행복해요. (등장하는 니나를 서둘러 맞으러 가며) 매혹적인 내 사랑, 내 삶의 꿈...

니나 : (흥분해서) 아, 안 늦었지...정말 안 늦었어...

니나 : 아버지와 새어머닌 날 이곳에 못 어게 하셔. 이것에 보헤미안들이 있다고 하시며... 내가 배우라도 될까봐 걱정이셔... 그래도 난 갈매기처럼 이 호수에 끌려... 내 맘 가득, 온 가득 너뿐이야. (주위를 둘러본다)

뜨레쁠레프 : 우리뿐이야.

니나 : 누가 오는 것 같아

뜨레쁠레프 : 아무도 없어 (키스한다)

니나 : 저건 무슨 나무야?

뜨레쁠레프 : 사랑해

니나 : 쉿


이어서 등장한 뜨레쁠레프는 삼촌 소린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인생과 어머니에 대해 투덜거린다. 하지만 곧이어 들리는 발소리에 급격한 감정 변화를 보인다. 사소한 인기척에도 사랑하는 여인의 것임을 알아차리고 금세 밝아지는 모습은 깊은 짝사랑에 빠진 청년의 감정변화를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니나는 ‘흥분해서’ 무대로 들어온다. 아버지와 계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작가 뜨리고린 앞에서 자신의 연기를 보여줄 생각에 들뜬다. 얼만큼 그녀가 기뻐하는지는 니나 역 배우가 얼마나 숨차게 무대에 입장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캐릭터의 감정은 배우의 표현 방법에 따라 깊어질 수도, 혹은 얕아질 수도 있다.

뒤이어 그녀는 자신이 갈매기처럼 호수에 끌린다고 한다. 이는 단지 호수가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니나와 뜨레쁠레프는 모두 부모님과의 갈등 때문에 집 밖에서 떠도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상황에 그들은 각기 작가와 배우를 꿈꾸며 호숫가에서 만난다. 호수는 기댈 곳 없는 이들의 안식처이자 그들의 추억이 담긴 곳이다. 과연 호수는 어떻게 생겼을까? 비록 관객의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바다처럼 넓고 깊을 것이다. 호수의 깊이만큼 니나와 뜨레쁠레프 사이의 감정은 깊다. 그런데 니나는 뜨레쁠레프에 집중하지 못한다. 말로만 ‘너뿐이야’를 외치고 두 눈은 다른 곳을 바라본다. 우리가 일상에서 말을 할 때 진실을 말하는 건 눈이다. 눈은 거짓말 못한다. 입으로 괜찮다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눈은 괜찮지 않다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니나의 시선을 통해 그녀의 마음이 다른 곳에 가있음을 알 수 있다. 뜨레쁠레프와 스킨십을 꺼리는 행동도 그녀가 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르까지나 : 유황 냄새가 난다.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니?

...

뜨레쁠레프 : (화를 내며 큰 소리로) 연극은 끝났어요! 그만! 됐어! 막을 내려!

...

소린 : 이리나, 젊은 애의 자존심에 그렇게 상처를 주는 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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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레플레프의 연극이 시작됨과 동시에 아르까지나는 무대에 대해 거침없이 비난하고, 그녀와 말다툼을 벌이던 뜨레쁠레프는 화를 내며 결국 극을 끝내고 만다. 극 중 인물들은 모두 아르까지나가 뜨레쁠레프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며 책임을 씌운다. 실제로 그럴까? 무엇 때문에 뜨레쁠레프가 진짜 화가 난 것일까?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극 중 극이 공연되던 상황을 상상해보자. 니나가 무대에 올라 대사를 읆조릴 때 그녀의 앞에는 수많은 관객들이 있다. 대다수는 그녀가 아는 사람이고, 오직 한 사람 뜨리고린만을 처음 본다. 자신이 꿈에 그리던 작가의 앞에서 공연을 하다니! 이러한 상황에 과연 그녀는 뜨레쁠레프와 연습했던 그대로 연기를 했을 것이가? 아마 니나는 뜨레플레프의 연출을 잊고 세상 모든 남자를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연기를 혼신을 다해 펼쳤을 것이다. 뜨리고린은 무대에서 가장 빛나는 여인인 니나와 눈이 마주치며 그녀를 갖고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뜨레쁠레프의 관점으로 돌아가서, 그는 아마 사랑하는 니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니나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있다. 그가 니나의 불타는 시선을 따라 도착한 곳은 뜨리고린이다. 결국 그는 질투심에 불타 극을 중단해버린 것이다.


니나 : 아, 뵙게 돼서 너무 기뻐요... (당황하며) 전 항상 선생님 작품을 읽고 있어요.

...

니나 : 이만 가봐야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아르까지나 : 어딜 가요? 뭐가 그렇게 급해요? 놔주지 않을 거에요.

니나 :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

뜨레쁠레프 : (등장) 벌써 다 가버렸네, 아무도 없이.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니나는 무대 뒤에서 조심스레 나온다. 그녀는 마치 뜨리고린을 처음 본 마냥 수줍게 인사하며 설렘을 표출한다. 하지만 그 감정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니나는 아마 극이 멈춘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뜨리고린에게 내보일 수 있는 기회를 뜨레쁠레프에 의해서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 것도 단순히 부모님이 기다리기 때문일까? 앞서 그녀는 아버지와 계모가 집 밖으로 나갔다 밝혔다. 그녀가 돌아가고 싶은 진짜 이유는 뜨레쁠레프를 마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니나는 이제 새로운 사랑, 뜨리고린을 만났다. 작가 지망생에 불과한 뜨레쁠레프가 눈에 들어올리 없다. 이런 마음을 들키기도 싫고, 자신의 연기를 멈춘 그가 미운 마음에 그녀는 집으로 돌아간다.


짧게나마 읽어본 [갈매기]이지만, 단순히 텍스트만 읽었을 때는 보지 못했던 다양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각 인물들의 말과 행동은 그저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밖으로 내보이는 것보다 그 안에 숨겨진 뜻이 더 복잡하고 무긍무진하다. 이는 마치 현실과 비슷하다. 우리가 말 한마디를 뱉을 때 그 순간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오가는가. 특히나 작품 속 니나와 뜨레쁠레프의 대화처럼 그 말이 사랑을 고백하는 말이라면, 혹은 상처를 주는 행동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아'라고 말하고, 진심으로 사랑할 때 '사랑해'라는 말을 내뱉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의 내면과 외면은 다르게 행동한다. 상상을 통한 체홉 재해석을 통해 우리는 어떤 말을 한다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란걸, 진심은 밖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미지 출처 : 구글

[하민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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