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음에 대한 선택은 인간의 권리가 될 수 있을까 - 아무르 (Amour, 2012) [시각예술]

글 입력 2015.03.01 23:0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2015-02-22 22;14;46.PNG


아무르 (Amour, 2012)

감독- 미카엘 하네케

127분/ 드라마



영화 아무르 (Amour, 2012)는 한 노인의 죽음에서부터 출발한다. 출동한 경찰들이 다급하게 잠금장치를 부수고 들어온 집에는 죽은 노인이 누워있다. 베갯맡에 흩어져있는 물기 마른 꽃잎에 둘러싸인 채.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잠이 든 듯 평안한 표정으로 맞이한 노인의 죽음을 감히 아름답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판단을 잠시 미뤄두고, 영화의 출발점에서 마주한 죽음이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흔히 죽음과 끝을 함께 병치하기 마련이니. 





2015-03-01 23;00;12.PNG



영화는 죽음이 전제된 집에서부터 출발한다. 이곳은 노부부가 함께 식사하고, 사랑을 나누며, 잠들던 자리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들이 살아오던 행복한 생을 추적한다. 음악가 출신 부부인 조르주와 안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안나의 제자인 알렉상드르의 연주를 감상하러온 것. 그러나 죽음은 마치 그들의 집안에 급작스레 침입한 도둑처럼, 날아 들어온 비둘기처럼 그들의 머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안나의 갑작스러운 증상과 함께 그들의 평온하던 노후에도 작은 금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금은 걷잡을 수 없으리만치 그들의 삶에 커다란 파열음을 만들어낸다. 균열 난 자리에 서있는 것은 반신불수가 된 채 휠체어에 오른 안나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이들 노부부는 최대한 일상적의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는 않다. 서서히 짙게 변해가는 죽음의 그림자 밑에서 안나는 한없이 연약하게 변해간다. 무엇보다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자신이 돌연 누군가의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안나는 견딜 수 없어한다. 조르주 역시 괴로워하는 안나 옆에서 같은 무게의 슬픔을 떠안는다. 이들의 불행을 동정하는 이들은 오직 타인일 뿐. 슬픔을 나눌 수는 없다.


점점 커다랗게 몸을 불려가는 죽음의 공포는 또 어떠한가. 그들은 누군가의 (어쩌면 그들과 유사한 방식의)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떤다. 내가 죽음을 맞는 순간, 그것은 오직 단 한 번의 순간이기에 그것은 어떤 말로도 수사할 수 없으리만치 두려운 순간이다. 그러나 정작, 나의 죽음을 마주한, 살아있는 이들은 그 죽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는다. 그들은 그 웃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한정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우리의 죽음도 실은, 그렇듯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 즉 우리가 최대한 인식의 꼬리를 붙잡고 있으나 언젠가는 이것을 놓아야하고, 그 앞에는 우리의 인식은 전혀 관여되지 않은, 통제되지 않는 죽음만이 오롯이 남아있을 뿐이니. 이 절망적인 공포는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를 의문한다.





2015-03-01 23;00;39.PNG



여기서 ‘인간답게’ 라는 말은 무엇인가? 안나는 점차 전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정신을 놓게 되는 일이 잦아진다. 점차 안나의 행동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르주는 어느새 완전히 이기적이고 고집불통의 어린아이로 변해버린 안나와 마주한다. 조르주의 지친 표정을 거둘 자리는 없다. 자신 역시 안나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한 발짝 다가서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조르주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아내 안나를 죽이고, 자신 역시 죽음을 향해 걸어가기로 결정한다.




2015-03-01 23;02;02.PNG



영화는 영화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존엄사에 관한 거대 메시지의 장막을 걷어내고서라도, 장면 자체의 매력이 크게 돋보인다. 특히나 죽음의 메타포라 볼 수 있는 비둘기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조르주는 처음 비둘기가 집에 들어왔을 때에는 그것을 내쫓는다. 마치 죽음에서 저항하려는 몸짓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안나를 떠나보내고 난 직후, 그는 느릿느릿 비둘기를 쫓아 잡는다. 담요에 감싼 새를 가만히 껴안는다. 마치 죽음을 뜨겁게 껴안는 것처럼. 조르주가 죽음을 받아드리는 방식의 변화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매력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문득문득 환각처럼 조르주의 눈앞에 등장하는 안나의 모습은 짧고 아득하다. 영화는 단 한 번도 쏟아지는 법이 없다. 우리는 조르주의 거칠게 메마른 표정 앞에 선다. 그것은 이쪽을 향해, 백번의 울음보다 더 자세히 또 세밀하게 조각조각 파편 난 그의 내면을 비춘다.



2015-03-01 22;59;20.PNG

2015-03-01 23;01;05.PNG


이쯤에서 수면으로 질문 하나를 던진다. 우리 인간에게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하는. 죽음 자체에 대한 선택권보다도 우리가 스스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는 죽음으로 우리 자신의 존엄을 지켜낼 권리가 있는 걸까. 삶의 유지가 삶을 만드는 것일까. 인간으로서 인식이 삶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답은 우리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서포터즈3기-박소현님-태그2.png


[박소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