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효율적인 이동과 노동력을 중심으로 정상성의 기준을 세우고, 이에 미달하는 상태를 장애나 불필요한 것으로 분류해 왔다. 장애는 신체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 특정 능력을 경제적 유용성으로 평가하는 사회적 기준이 만들어낸 개념에 가깝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일상의 생활 공간으로 끌어와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서울 도봉구 백운시장 내 책방 ‘생활용품’(우이천로 477)에서 열린 인문 프로그램 <시장에 선 철학자>다. 첫번째 회차에서는 ‘다양한 몸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주제로 자본주의적 생산성 규범과 그 안에 작동하는 배제의 구조를 다루었다.
이번 강연은 목광수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연사로 나섰다. 목광수 교수는 정의론과 생명의료윤리, 인공지능 윤리 등 실천윤리학을 주로 연구해 온 학자다. 그는 이번 글에서 장애를 특정 소수자의 특수한 문제로 한정하지 않고, 인간 생애 전반에 내재된 ‘보편적 취약성’의 관점으로 풀어냈다. 존 롤즈 계약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아마르티아 센의 역량 접근법을 경유하며, 장애 윤리가 시혜나 동정이 아닌 동등한 시민의 공존을 위한 ‘보편 윤리’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자본주의적 생산성 규범과 장애의 타자화
한국 사회의 공공장소나 대중교통에서 장애인을 마주치는 일은 여전히 생경하다. 이는 장애인의 절대수가 적어서가 아니다. 2025년도를 기준으로, 한국의 등록 장애인은 5%나 되지만, 우리는 밖을 다니며 장애인이 그렇게 많음을 체감하진 못한다. 이들이 일상으로 나오는 과정에 촘촘히 가로놓인 물리적·제도적 장벽과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다.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목광수 교수는 장애를 특정 소수자만의 특수한 문제로 제한하지 않는다. 인간은 질병과 사고, 노화를 겪으며 누구나 기존의 기능을 상실하거나 타인의 돌봄에 의존하게 된다. 즉, 장애는 고정된 타인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생애주기 전반에 내재된 보편적 가능성이다.
장애를 바라보는 대표적인 틀로는 ‘의료적 모델’과 ‘사회적 모델’이 있다. 의료적 모델이 장애를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손상으로 보고 치료와 재활에 집중한다면, 사회적 모델은 개인의 몸이 아닌 그 몸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적 환경과 제도의 부재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사회적 모델은 장애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한다. 다만 목 교수는 어느 한 모델만을 절대화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장애의 유형과 개별 정황에 따라 신체적 치료가 시급한 경우도 있고, 환경과 제도의 개선이 더 시급한 경우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장애 정의론은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어떤 개입이 더 정의로운지 판단하는 기준을 제공해야 하며, 정책적 지원이 당사자의 존엄과 자율적 선택권을 훼손하지 않는지 세심히 살펴야 한다.
이러한 논의의 기저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성 규범이 짙게 깔려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신속하게 이동하고, 정보를 처리하며, 정해진 시간 동안 유효한 노동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정상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 기준에 미달하는 존재를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존재로 분류한다.
"사실 ‘장애’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공식화된 계기를 들여다보면, 자본주의의 발전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해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당장 쓸모 있는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분들이 ‘장애’로 규정된 측면이 크거든요. 생각해 보면 조금 천천히 걸으면 어때요? 계산이 조금 어두우면 또 어때요?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데는 사실 아무 문제 없거든요. 다만 돈 버는 데 유리하지 않으니까, 사회가 이걸 ‘문제’나 ‘결핍’으로 바라보는 건 아닐까 싶은 거죠. 결국 장애라는 건 개인의 몸에만 있는 객관적 결함이라기보다, 특정 능력을 경제적으로 유용하다고 평가하는 사회의 판단이 함께 만들어낸 개념인 셈이에요."
# 정의론의 구조적 배제와 개인 보상 모델의 윤리적 함정
목 교수는 장애를 대하는 방법으로 존 롤즈의 계약론에서 출발해, 마사 누스바움의 비계약론적 접근을 거쳐 아마르티아 센의 역량 접근법에 안착한다. 목 교수는 장애인을 대하는데 있어서는 센의 역량 접근법이 가장 나은 대안이라고 결론짓는다.
롤즈의 계약론은 상호 이익을 도모하는 합리적 시민들이 공정한 조건에서 합의한 원칙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방식은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고, 논리적으로 소통하며, 계약의 결과를 인식할 수 있는 주체만을 참가자로 전제한다. 이러한 인간관 안에서는 지적장애인이나 비언어적 소통자가 정의의 원칙을 수립하는 당사자로 참여하기 어렵다. 대리인이 참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당사자의 생생한 경험과 선호를 온전히 대변한다고 보장할 수 없다.
"장애인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그런데 ‘장애인이 법적·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격체인가?’라는 물음에는 다들 은연중에 의문을 표하곤 해요. 예전에는 ‘금치산자’라고 불렀고 요즘은 성년후견제도 같은 걸 쓰는데, 지적 장애가 있는 분들은 재산을 물려받거나 거래를 하더라도 법적으로 인정받기 어렵잖아요. 예를 들어 제가 지적장애인분께 ‘이 건물 저한테 백 원에 파세요’ 해서 그분이 ‘그러죠’ 하고 합의했더라도, 그 계약이 성립하나요? 안 되죠. 법적으로는 그 합의에 지적 능력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고 보고 책임을 지우지 않는 거예요. 합의나 계약 능력을 기준으로 삼다 보니, 정작 사회의 기본 원칙을 만드는 논의 구조에서는 이분들이 지속적으로 배제되어 온 건 아닐까 돌아보게 됩니다."
분배적 정의의 실천 과정에서도 윤리적 함정이 발생한다. 국가가 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얼마나 취약한지 판정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수혜자는 자신의 ‘능력 부족’과 ‘무능함’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철학자 엘리자베스 앤더슨은 이러한 ‘개인 보상 방식’이 시민 간의 사회적 위계를 형성한다고 비판한다. 복지가 동등한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라, 정상성 기준에 미달한 약자에게 베푸는 ‘시혜’나 ‘동정’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 교수는 장애인에게 배분할 자원의 양뿐만 아니라, 그 분배가 어떤 인간관을 전제하고 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질적 자원을 제공하더라도 당사자를 열등한 존재로 인격화한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지원이라 할 수 없다.
더나아가 장애를 본질적으로 나쁜 상태로 규정하는 태도 역시 경계해야 한다. 당사자들이 자신의 신체적·감각적 특성을 반드시 결핍으로 인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001년 미국 타임지에 실려서 논쟁이 크게 붙었던 사건이 하나 있어요. 청각장애를 가진 레즈비언 커플이 5대째 청각장애가 이어진 집안의 정자를 기증받아 일부러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를 출산했거든요.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할 때 약간 불쾌하거나 의아한 마음이 든다면, 그건 우리 마음에 이미 ‘안 들리는 것은 무조건 나쁜 것이고 극복해야 할 손상’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어서일 수 있어요. 하지만 농문화 커뮤니티에 계신 분들은 안 들리는 걸 전혀 불편해하지 않거든요. 수어나 기호로 시도 쓰고 깊은 소통을 하면서 자신들만의 풍요로운 문화를 누려요. 그 커플은 자기가 속한 이 좋은 문화를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거죠. 타인의 삶이나 감각적 특성을 외부의 ‘정상성’ 기준만으로 나쁘다고 단정할 수 있을지, 한번 조심스럽게 물어볼 필요가 있는 대목입니다."
# 마사 누스바움에서 아마르티아 센으로
누스바움은 계약 능력을 정의의 전제 조건으로 삼았던 롤즈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인간은 합리적으로 계약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존엄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인간을 독립적이고 완벽히 자족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돌봄을 필요로 하며 생애 전반에 걸쳐 타인과 공동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존재’로 규정한다.
이를 바탕으로 누스바움은 존엄한 삶을 위해 국가가 보장해야 할 핵심 역량 목록을 제시한다. 그러나 목 교수는 누스바움이 인간다운 삶의 기준이 되는 역량의 목록을 철학자의 시선에서 미리 확정해 버렸다는 점을 지적한다. 규범적 목록의 선제적 확정은 또 다른 형태의 ‘정상성’을 강요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스바움은 건강이나 차별받지 않을 권리처럼 인간에게 필요한 ‘역량의 목록’을 정해둬요. 그러고는 역량 접근법의 창시자인 센에게 ‘너도 빨리 필수 목록을 정해봐’라고 촉구하죠. 하지만 센은 ‘나는 못 정하겠다. 이건 각 사회가 자기 사정에 맞게 스스로 정해야 할 몫이다’라며 거부해요. 누스바움 방식도 따뜻하지만, 철학자가 ‘인간의 본질에 이게 필요하다’고 사전에 목록을 딱 정해버리는 순간, 각자의 맥락을 무시하는 또 다른 강요나 강압이 될 위험이 있다는 걸 센은 경계한 겁니다."
목 교수가 더욱 설득력 있는 대안으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센의 ‘역량 접근법’이다. 센에게 정의란 단순히 동일한 자원이나 재화를 똑같이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실제로 '선택하고 누릴 수 있는 실질적 자유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다. 개개인의 신체적 조건과 환경이 다르기에 같은 자원이 주어지더라도 이를 통해 실현할 수 있는 삶의 양상은 달라진다.
센은 보편적 역량 목록을 고정하지 않는 대신, 무엇이 중요한 역량인지를 결정하는 ‘공적 추론(Public Reasoning)’의 과정을 강조한다. 목 교수는 이 공적 추론의 장을 전통적인 언어적 담론에만 한정하지 않고, 비언어적 표현까지 대폭 확장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지적 장애가 있어서 정제된 말을 잘 못할 수도 있고, 신체적 조건 때문에 소통이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이분들의 경험을 배제할 거냐, 그건 아니라는 거죠. 말이나 글이 아니더라도 몸짓이나 표정,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표현해 낼 수 있다면, 그 역시 모두 ‘공적 추론(Public Reasoning)’의 장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을까요? 롤즈처럼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합의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위치에 있는 목소리들이 꼭 정형화된 언어가 아니더라도 공적으로 표출되고 서로 들어줄 때, 비로소 배제 없는 정의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봐요."
언어와 글이라는 정형화된 틀을 넘어선 다채로운 표현까지 당사자의 의사소통으로 수용할 때, 장애인은 타인의 대변에 의존하는 수동적 객체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정당한 주체로 서게 된다.
# 보편적 취약성에 대한 윤리적 승인: 다름을 다양성으로 포용하는 사회
목 교수가 제창하는 장애 윤리의 핵심은 ‘인간의 보편적 취약성’을 겸허히 승인하는 데 있다. 인간은 타인의 보호 없이 생존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로 태어나며, 삶의 궤적 속에서 질병과 사고, 노화를 마주하며 언젠가 반드시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단절된 두 집단으로 이분법화하는 시각은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영역에서는 자립적이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취약할 수 있으며, 약자로서의 위치는 환경과 생애 단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사회적 약자’라는 개념을 고정된 신분처럼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연동성이 있거든요. 걷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도 고소공포증이 있거나 밀폐된 공간을 힘들어할 수 있고, 감정적·정신적으로 유난히 약한 지점이 다들 있잖아요. 결국 우리 모두는 어느 생애 단계나 영역에서 저마다의 약함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인 거죠."
장애는 한 인간의 인격 전체를 규정하는 절대적 정체성이 아니라, 그가 가진 다양한 속성 중 하나일 뿐이다. 장애라는 단 하나의 프레임으로 사람을 가둬버릴 때, 그 개인이 가진 다채로운 관계와 욕구, 잠재력은 사회적 무관심 속에 은폐된다.
"영어 단어의 변화를 보면 철학의 변화가 보여요. 옛날에는 ‘handicapped person’이라고 하다가 ‘disabled person’을 거쳐, 요즘은 ‘person with disability’라고 부르거든요. 장애를 그 사람 전체를 결정짓는 명사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수많은 속성 중 ‘하나(with disability)’로 바라보기 시작한 거죠. 그냥 ‘장애인’ 하고 단정 지어 버리면, 그 사람이 가진 다른 무궁무진한 속성들이 장애라는 그늘에 가려 보이질 않게 되니까요."
이러한 인간관의 전환은 ‘돌봄’의 형태 역시 바꾸어 놓는다. 돌보는 주체와 돌봄을 받는 객체를 고정된 위계로 놓는 시각에서 벗어나, 당사자가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역량 강화형 돌봄’으로 나아가야 한다.
장애인이 일상의 평범한 시민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리적 인프라 확충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지 구도의 변혁이 필수적이다. 장애인을 시혜적 동정의 대상이나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해체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 장애가 있는 분이 지나갈 때 아무도 유심히 쳐다보지 않는 사회가 아닐까 싶어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한여름인데 두꺼운 파카를 입고 다니는 학생을 보고 신기해서 쳐다본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둘러보니 쳐다보는 사람이 저밖에 없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죠. ‘아, 특별한 눈으로 주목하지 않고, 그저 평범한 일상의 풍경으로 바라봐 주는 세상이 진짜 다 함께 사는 사회겠구나.’ 지나친 동정이나 특별 대우가 아니라, 모두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평범함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장애인의 사회적 참여를 확장하는 일은 특정한 소수자 집단을 위해 예외적인 특혜를 제공하는 작업이 아니다. 특정 신체와 생산성만을 정상으로 타당화해 온 기존 사회의 보편성 기준을 더욱 넓고 촘촘하게 재설계하는 일이다.
결국 장애 윤리는 장애인만을 향한 특수 윤리가 아니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취약하며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각기 다른 몸과 능력, 속도를 가진 이들이 어떻게 존엄하게 공존할 것인가를 묻는 가장 근본적인 ‘보편 윤리’다.
한편, 이번 자리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한국도서관협회가 주관한 '길위의 인문학' 사업에 선정되어 진행되었다. 또한, 문화예술교육 전문단체 '아트다락'과 쌍문동 카페 '숲오'가 협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