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을 반으로 가르면 가장 안쪽에 씨앗이 있다. 겉으로는 하나의 열매이지만 그 안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가능성이 잠들어 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그 작은 구조에 여성의 몸과 생명에 관한 의미를 부여해 왔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과정을 여성의 성장과 출산에 빗대었으며, 붉은 과육과 그 안의 씨앗에서 자궁과 생명의 이미지를 발견했다.
여성을 열매에 비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생명을 품는 힘에 대한 경외였을까. 아니면 여성의 삶을 성숙과 결실, 출산이라는 과정으로 설명하려는 오래된 시선이었을까.
여성을 꽃과 열매에 비유하는 표현을 처음 접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아름다운 수사인지, 여성을 대상화하는 오래된 관습인지 막연하게만 느껴왔다. 익숙하게 사용되는 말 안에 어떤 시선이 남아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여성 상징 사전 4: 식물과 광물』을 읽으며 나는 이 책이 내게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설명할 수 없었던 불편함의 기원을 찾아갈 언어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 상징 사전』 시리즈는 보이지 않았던 뿌리를 더듬어준다. 신화와 민담, 종교와 역사를 연구해 온 바버라 G. 워커가 25년에 걸쳐 여러 문화권의 자료를 모아 집필한 『The Woman’s Dictionary of Symbols and Sacred Objects』를 네 권으로 나누어 번역한 시리즈다. 1988년 처음 출간된 원서는 700개가 넘는 표제어와 600여 점의 삽화를 통해 여성을 둘러싼, 오래된 표상과 신화를 추적한다. 국내에서는 2024년 1권과 2권이 먼저 소개됐으며, 2026년 3권과 4권이 출간되며 완간됐다.
그중 『여성 상징 사전 4: 식물과 광물』은 식물과 광물,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음식과 사물에 새겨진 여성적 의미를 추적한다. 장미와 연꽃, 겨우살이와 쑥, 참나무와 생명나무뿐 아니라 빵과 포도주, 마늘과 양파, 다이아몬드와 진주, 소금처럼 일상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사전의 표제어가 된다.
사전이라는 제목 때문에 딱딱한 해설서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책을 읽는 것은 단어의 정의를 확인하는 일과는 다르다. 하나의 표제어를 따라가다 보면 서로 다른 시대와 지역의 신화가 이어지고, 익숙한 사물 아래 묻혀 있던 오래된 의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익숙한 의미들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시대와 권력, 종교 질서가 변화하는 동안 어떤 의미는 선택되었고 다른 의미는 희미해졌다.
상징의 연관성이 아무리 자의적이고 임의적이라고 해도 상징에는 항상 의미가 있다. 이 책의 한 가지 목적은 이런 유형의 다양한 상징들을 여성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 「서문」중에서
워커 역시 상징을 하나의 고정된 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이 사전이 건네는 것은 유일한 해석이라기보다, 오랫동안 배제되거나 잊혀온 해석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경로다. 그는 특히 가부장적 종교 질서가 자리 잡기 이전의 여성적 신성과 여신 숭배의 흔적에 주목한다. 워커의 해석에 따르면, 그 질서가 변화하는 동안 현실에서 행사되던 권한뿐 아니라 여성의 존재를 설명하는 언어와 이미지도 여러 차례 다시 쓰였다. 오늘날 평화의 상징으로 익숙한 비둘기에서 여성의 성적 욕망을, 아름다움과 영원함을 나타내는 다이아몬드에서 여신의 자궁 성소와 관련된, 오래된 의미를 읽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빵과 체리, 상징은 어떻게 다시 쓰였는가
특히 기억에 남는 표제어는 ‘빵’과 ‘체리’였다. 책에 따르면 인간의 생존을 지탱해 온 빵을 베푸는 존재는 곡물의 어머니이자 제빵과 제분, 화덕을 돌보는 여신이었다. 워커는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구절 역시 여신에게 올리던 기도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지금은 남성 신에게 양식을 청하는 문장 아래, 한때 먹을 것을 내어주던 여성적 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여주인(lady)’과 ‘주(lord)’를 뜻하는 말의 어원이 각각 빵을 베푸는 자와 여신의 창고를 지키는 자에서 파생되었다는 설명도 흥미롭다. 빵 한 덩어리에는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의 노동과 권한에 관한 기억이 겹겹이 구워져 있었다.
체리의 역사는 더욱 미묘하다. 책은 「체리나무 캐럴」을 부처의 어머니 마야와 신성한 나무에 얽힌 이야기와 연결한다. 나무는 신성한 아이를 품은 마야를 알아보고 스스로 허리를 굽혀 열매를 내어주며 출산을 돕는다. 붉은 과육 안에 씨앗을 품은 체리는 자궁과 생명력의 흔적으로 읽혔다.
그러나 오늘날 ‘체리’는 여성의 처녀성을 가리키는 성적 은어로 더 익숙하다. 생명의 가능성을 품었던 열매가 어느 순간 처녀성을 가리키고 판단하는 언어로 격하된 것이다. 하나의 열매 안에서 숭배하려는 마음과 소유하려는 마음이 구분되지 않은 채 뒤엉켜 있다. 열매와 여성의 몸을 연결하는 시선은 처음부터 순수한 경외도, 오직 억압만도 아니었다. 생명을 낳고 먹이는 힘을 향한 찬미는 시간이 흐르며 모성과 처녀성이라는 규범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책을 읽는 재미는 이렇게 평범한 사물의 표면 아래 전혀 다른 세계가 포개져 있음을 발견하는 데 있다. 정화와 재탄생의 상징인 소금이 피와 바닷물의 짠맛을 매개로 자궁과 연결되었다는 설명이나, 난초의 영어 이름이 고환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소금을 뿌려 악한 것을 물리치는 오래된 행동과 선물로 주고받는 꽃에도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던 시간이 스며 있다.
상징의 역사를 다시 묻는 일
『여성 상징 사전』은 과거의 이미지를 모아놓은 자료집을 넘어선다.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상징에도 역사가 있으며, 그 역사는 권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오래된 관습을 인류가 자연스럽게 공유해온 유산으로 여긴다. 그러나 무엇을 신성한 것으로 기억하고 무엇을 불길한 것으로 배척할지, 누구를 창조의 주체로 남기고 누구를 유혹과 타락의 원인으로 기록할지는 중립적인 선택이 아니다. 오랫동안 전승되었다는 사실이 하나의 해석을 유일한 진실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앎은 이미 일어난 역사를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현재를 자연스럽고 불변하는 질서로 받아들이지 않게 한다. 역사 속에서 여성이 지워졌다면 지금 우리에게 남은 빈자리 역시 그 부재가 당연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 존재를 지우고 다른 의미를 덧씌워서 만들어진 공백일 수 있다. 적어도 수많은 신화와 종교적 상징 안에서 여성적 형상은 생명과 죽음,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설명하는 중심에 놓여 있었다. 내가 느꼈던 불편함이 막연한 예민함이 아니라 오래된 역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설명할 수 없던 감각은 비로소 하나의 인식이 된다. 그리고 그 인식은 나의 경험을 함부로 의심하지 않을 작은 근거가 되어준다.
물론 이 책의 모든 해석을 의심할 수 없는 정답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여러 시대와 문화권의 상징을 여성적 신성과 가부장적 질서의 충돌이라는 큰 흐름으로 연결하는 과정에는 대담한 추론과 일반화도 포함되어 있다. 1988년에 처음 출간된 책인 만큼 이후 축적된 연구와 함께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부분도 존재한다. 서로 다른 종교의 이야기 사이에서 직접적인 계보를 발견하는 대목은 워커가 제시하는 하나의 해석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타당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완결된 답을 준다는 사실이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질문조차 하지 않았던 해석을 낯설게 만든다는 점이다. 『여성 상징 사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 책도 아니다. 좋아하는 꽃이나 자주 먹는 과일, 아침마다 마주하는 빵처럼 자신에게 익숙한 표제어에서 출발해도 좋다. 하나의 상징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잃고, 또 어떻게 다른 의미를 덧입어왔는지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이 책을 덮은 뒤에도 열매는 여전히 씨앗을 품고, 빵은 식탁 위에서 식어가며, 나무는 자라고, 돌은 말없이 그 자리에 놓여 있다. 달라진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다. 한 번 발견한 흔적은 다시 보이지 않게 만들 수 없다. 『여성 상징 사전 4』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책이라기보다, 늘 우리 앞에 있었지만 오래도록 다른 이름으로 불려 온 세계를 돌려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