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보다 보면 지금 보는 작품이 오늘, 혹은 요즘의 나와 주파수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직감이 들 때가 있다.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을 본 날이 그랬다. 32살의 평범한 직장인 유미가 나랑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내가 그녀와 나이가 비슷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난 요즘 재밌는 것도 감흥을 주는 것도 없는 무감의 상태에 놓여 있다.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 좋아하던 뮤지컬을 보아도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앉아있는 그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문득 걱정이 밀려왔다. ‘내가 좋아하던 것마저 재미가 없어진다면, 나는 이제 정말 무슨 재미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자존감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가 나 스스로를 살뜰히 보살피는 부모가 되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흔히 친구나 타인을 부모처럼 아끼고 챙겨주는 건 쉬운 일이지만, 자기 자신을 온종일 돌보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나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하는 존재는 결국 '나'이기에, 내 모습이 싫어지기 시작하면 나 자신과 함께하는 매 순간이 괴롭고 가시방석 같아질 수밖에 없다.
내가 이렇게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는 와중에, 유미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애써주는 세포들의 모습을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나를 미워하는 순간에도 내 안의 존재들은 나를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포들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던 건,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늘 나를 지탱해 준 ‘내면의 에너지’였음을 비로소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깊고 아득한 내면세계를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놀라울 정도로 입체감 있게 구현해 냈다는 점이다. 현실 세계 유미의 일상이 전면부에 펼쳐지는 동안, 그 너머로 깊숙하게 레이어를 겹쳐 확장되는 무대는 마치 관객으로 하여금 한 인간의 무의식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강렬한 공간감을 선사한다.
이 연출적 공간감이 빛을 발하는 하이라이트는 ‘팀 109’가 유미의 깊은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두려움 세포’를 찾아 나서는 장면이다. 어둠 속에 꽁꽁 파묻혀 있던 두려움 세포는 거대한 존재감으로 무대를 압도하며 유미를 짓눌러온 감정의 무게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109 세포의 진심 어린 설득과 손길을 통해 마침내 제 모습을 찾았을 때, 드러난 진짜 두려움 세포의 크기는 놀라울 정도로 작고 보잘것없었다. 내면의 두려움이란 그것을 똑바로 직시하고 포용하기 전까지만 거대해 보일 뿐이라는 극적 역설을, 시각적 크기 대비 연출을 통해 직관적이면서도 강렬하게 전달해 낸 것이다.
유미라는 인간에게 가장 주축이 되었던 프라임 세포는 사랑 세포였다. 유미는 자신의 남자친구인 ‘구웅’을 자신만큼이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판단의 기초가 되는 것이 헌법인 것처럼, 유미에게 사랑 세포는 모든 세포들의 행동과 판단의 척도의 자리에 위치해왔다. 사랑 세포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마음들은 단숨에 ‘구속 확정’이라는 팻말과 함께 감옥에 갇히고 마는데, 이 귀여우면서도 씁쓸한 장면은 유미가 사랑을 위해 얼마나 많은 내면의 목소리를 검열하고 통제해 왔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유미는 점차 자기 자신보다 남자친구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관계는 점점 더 틀어지고, 그럴수록 유미의 마음속 저금통에 충전되어 있던 사랑의 양은 줄어들며, 이내 세포들은 곧 대홍수가 올 거라며 걱정한다.
구웅과의 관계가 비틀어지고 사랑 세포마저 무력해진 순간, 극은 유미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 삶의 진짜 프라임(Prime)은 무엇인가?’
이때 완벽하고 당당한 '사랑 세포'를 동경하며 무대 구석의 어두운 그림자 속을 겉돌던 견습 세포 109가 있다. 그 세포는 하얗고 어린 강아지 '백구'처럼 귀엽고 순수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조차 얻지 못한 채 단지 순번 대기표 숫자 같은 '109'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미완의 존재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 109 세포의 불안한 방황이야말로 관객석에 앉아 있던 나의 무기력함과 가장 많이 닮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움직이는 동력을 잃어버린 채 내가 나를 미워하고 방치하는 동안, 내 안의 어느 구석에서도 이름을 얻지 못한 마음들이 저렇게 주인을 잃고 헤매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견습 세포인 109가 보여준 가장 눈부신 역할은 유미의 무의식 어두운 구석에 처박혀 있던 ‘마이너 세포들’을 끌어안은 순간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억눌려 있던 그 마이너 세포들 역시 결국 유미를 지켜내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던 ‘유미의 소중한 한 부분’이었음을 109 세포가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차갑고 어두운 조명 아래 홀대받던 마이너 세포들이 109 세포의 다정한 손길을 통해 마침내 무대 중앙의 따뜻한 조명 아래로 합류하는 연출적 순간은 먹먹한 감동을 선사한다.
유미가 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을 멈추고 비로소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돌보겠다고 다짐한 순간, 이름 없던 109 세포는 비로소 자신이 ‘자존감 세포’임을 확인한다. 사랑 세포가 헌법이었던 유미의 세계에 ‘자기 자신을 아끼는 마음’이라는 가장 뿌리 깊은 기본권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여기에 특히 오랫동안 멈춰 있던 작가 세포가 다시 연필을 쥐는 순간, 세포들이 다 같이 무대를 깨우며 탭댄스를 추던 연출도 인상적이었다. 발끝으로 바닥을 신나게 두드리는 그 경쾌한 리듬이 마치 원고지 위를 매끄럽게 달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오랫동안 멈춰 있던 유미의 일상이 다시 시원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존감 세포만이 절대적인 정답이거나 모든 사람의 프라임 세포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사람마다 지닌 삶의 가치관과 우선순위는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또 누군가에게는 이성이나 열정이 삶을 이끄는 프라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세포들이 유미를 위해 목놓아 부르던 넘버의 가사처럼, 우리 각자가 ‘단 하나뿐인 거대하고 소중한 하나의 우주’라는 사실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인터넷에서 보았던 한 영상이 떠올랐다. 거대한 덩어리 밑으로 마치 실처럼 가늘고 어설픈 두 다리를 뻗어 뽀짝뽀짝 힘겹게 발을 내딛던 어느 작은 단백질의 모습 말이다. 내가 나를 마음속 골방에 가둔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던 그 순간에도, 내 안의 수많은 존재들은 그 가느다란 다리로 쉬지 않고 걸음을 옮기며 나를 살려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나를 포기하고 싶었던 그 순간에도, 내 안의 마음들은 단 한 순간도 나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이제는 나도 내 안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을 ‘자존감 세포’와 마이너 세포들을 챙겨주고, 안부를 물어주는 다정한 부모가 돼 주어야겠다. 유미가 그랬듯, 내 삶의 프라임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