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느러미가 상영된 날은 호우특보가 해제된 직후였다.
중부 지방을 타격하던 비구름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동그랗게 한반도를 감싸는 폭염이 시작됐다.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도 가방에는 언제 내릴지 모르는 비를 대비한 우산이 들어 있었고 잠깐 걷는 사이에도 기이할 정도로 땀이 흘렀다. 지구가 종말에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를 듣기엔, 아니 보기엔 딱 어울리는 날이었다.
배경은 근미래의 한국이다. 북한을 연상시키는 통제 사회의 분위기를 띤 통일 대한민국. 첫 장면에서 중대본의 노란 민방위복을 떠올리게 하는 형광색 복장의 공무원들은 '오메가'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죽은 오메가를 치우라고 지시한다. 오메가가 왜 태어났는지, 왜 죽었는지, 왜 그들이 공무원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영화는 그저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들과 오메가를 향해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는 사람들만 비춘다. 숨기지 않는 혐오 앞에서 괜히 내가 움츠러든다.
그들을 혐오하는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다르기 때문'이다. 독성 물질을 품은 지느러미, 발가락이 세 개인 발, 치명적인 소리. 오메가는 존재 자체가 유독한 것으로 규정된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 발을 숨기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아간다. 같은 처지의 오메가들끼리 뭉치지도, 서로를 고발하지도 않는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고, 가끔 자신만을 위한 작은 시간을 보낼 뿐이다. 바다의 독성 물질을 뒤집어쓰고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끝내 반항하지 않는다.

공무원 수진은 사회가 요구하는 목표를 충실히 수행하는 인물이다. 잡으라니 잡고, 두려우면서도 쫓는다. 겉모습만으로는 인간과 오메가를 구분할 방법이 없다. 오직 폭력으로 상대를 넘어뜨린 뒤 신발을 벗겨 발을 확인하는 원초적인 방식뿐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회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색출하고 숙청한다. 그래야만 지금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인간 사회에 숨어 사는 오메가 '미아'를 줄곧 따라간다. 낚시터의 '인공 발' 가게와 피아노 학원, 평범한 일상을 배회하는 미아를 두 사람이 뒤쫓는다. 하지만 그들이 얻는 것은 거의 없다. 미아는 누군가를 위협하지도, 체제를 뒤엎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수진은 끝내 그녀를 잡기로 결심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피곤했다. 하루 종일 더위에 지친 몸 때문인지, 강렬한 대비와 그레인 효과를 반복하는 화면에 눈이 먼저 지친 탓인지, 아니면 분절된 장면들이 나를 남겨둔 채 다른 시간으로 계속 건너뛰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최근 본 영화 가운데 가장 불친절한 영화였다. 영화는 코로나19 시절 경험한 단절과 혐오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등장인물의 행동도, 세계의 규칙도 거의 해설하지 않는다.
특히 고우의 등장 이후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길을 잃었다. 어떤 프로파간다의 대척점에 있는 오메가, 탈출을 감행할 정도로 힘이 있는 오메가. 그러나 그가 한다는 건 미아의 아빠, 동족의 지느러미를 유품으로 전달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힘없이 잡혀가는 것으로 역할을 끝낸다. 이들의 이야기는 꾸준히 혼란스럽다. 관객이 길을 잃든 말든 영화는 자기 속도로 흘러간다. 이해하기보다 그 사회의 공기를 견디는 일이 영화를 보는 경험에 더 가까웠다.
나는 일단 그 자리에 눌러 앉아 구분되지 않는 희생자들을 배웅한다. 은빛 천에 덮인 채 오염된 바다로 떠내려가는 오메가들을 배웅하는 이는 결국 관객과 오메가뿐이다.
사회가 밀어낸 존재들이 다시 오염의 바다로 돌아가는 모습을 붉게 내려앉은 해가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