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디즈니와 같은 동화를 통해, 착한 주인공의 시점으로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교훈 삼아 자랐다. 착해야 살아간다, 남을 배려해야 한다는 식으로. 착함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세상이라 그런 걸까. 이제는 배려보다는 남을 내치고 악함을 무기삼아 버틸 수 있는 세계가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멋진 신세계'가 비추는 두 사람도 다름 아닌 악역이다.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사연을 따라가다 보면 이 드라마가 시작된다. 2026 한국형 어른 동화, 이토록 묘하게 매력적인 악당들의 동화를 소개한다.
SBS 수목드라마 <멋진 신세계>는 조선의 강희빈이 사약을 받은 뒤, 2026년 무명배우 신서리의 몸에서 깨어나며 시작된다. 강단심은 든든한 뒷배 하나 없이 정1품 희빈의 자리에 올라, 미모로 조정을 농락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사약을 받고 억울하게 눈을 감은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깨어난 곳에서 마주치는 남자가 바로 냉혈 재벌 차세계다. 돈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도 팔겠다는, "악명이 뭐 어때서?"를 외치는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같은 남자. 이 둘의 충돌이 로맨스로 번지고, 전생의 인연과 현대의 권력 다툼이 겹치며 운명이 다시 얽히는 구조다. 그렇게 '멋진 신세계'는 각자의 세계에서 악역으로 살아가던 두 사람을 조선과 2026년이라는 두 시공간에 걸쳐 비춘다.
망가져도 망가진 대로, 함께라면
두 주인공은 다 악명이든 외로움이든 혼자 감당하며 독립적으로 살아가려 애쓴다.
"마음 따위 움트기 전에 베어내는 것이다.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도려내 버려. 아무도 닿지 않으면 부서질 일 따위 없어. 가만히 고여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 멋진 신세계 7화 신서리 대사 中
이미 데이고 쓰라린 상처를 반복하기 싫은 사람의 방어기제가 고스란히 담긴 말이다.
7화의 끝에 서리는 홀로 21세기 서울에 떨어진 자신을 계속 챙겨준 세계에게 더 이상 의지하지 않으려 한다. 마음이 움트기 전에 미리 베어내려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렇게 그를 외면하려 하면서도, 어두웠던 자신의 방을 밝혀준 그를 통해 애써 외면하려던 사랑이 나에게도 있다고 염치없이 염원하게 된다. 결국 그들 다 서로에게 건네는 진심 앞에 무너진다. 누가 정해준 운명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길로 돌아온 것이다. 이 둘에게 '사랑'은 동화 같은 판타지가 아니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선택지였을 것이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있었어도 진작 지워버렸을 선택지 말이다.
그래서 위기에 처한 세계를 위해 서리는 지탄받을 걸 알면서도 곧장 달려가, "망가지면 망가진 대로, 부서지면 부서진 대로 괜찮다, 너와 함께라면"는 식의 말을 건넨다. 오히려 함께이기에 더 빛난다고. 그들에게 쏟아지는 비판의 플래쉬를 밝혀주는 빛으로 바꿔버린다. 그리고 이 장면은 디즈니 엔딩으로 잘 알려진 피노키오의 〈When You Wish Upon a Star〉라는, 저작권이 크게 걸린 곡을 삽입하면서까지 전하고 싶었던 제작진들의 진심이 보이는 대목이다.
작감배덕의 완벽한 팀플
사실 시간 여행이나 빙의, 전생 같은 소재는 이제 한국 드라마에서 흔하다 못해 클리셰에 가깝다. 그런데도 이 작품을 보면서 진부하다는 느낌은 별로 안 들었다. 이런 디테일은 촬영 구도, 의상, 소품 하나하나에도 스며 있어서 덕후 입장에서는 안 보일 수가 없다. 다양한 떡밥 덕분에 서로 유추하고 다음 화를 기대하게 되면서, 덕후들 사이에서는 한동안 이 드라마에 대한 다양한 토론들과 이런 디테일들을 찾아내는 열전이 펼쳐졌다.
주인공의 전생인 이현과 단심을 합치면 일편단심이 되고, 신서리는 오뉴월의 서리이자 곧 'Oh New World'가 되며, 차세계는 다음 세계, 즉 이현의 다음 생을 뜻한다. 이런 식으로 이름 하나하나에 의미를 심어둔 걸 보면 작가와 제작진이 얼마나 공들여 이 세계관을 짜놓았는지 느껴진다. 실제로 신서리라는 배우의 홈페이지가 따로 만들어지거나, 화장품 모델이 됐을 때 극중 설정을 활용한 홍보 문구가 쓰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제작진이 곳곳에 심어놓은 이런 몰입 요소가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다 소개하기보다는, 아래 영상을 참고하거나 직접 찾아가보시길 추천한다.
이 모든 내용이 가능하다고 비춰지는 이유는, 당차면서도 그 아픔까지 담아낸 주인공 임지연 배우와,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여주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로코남주 역할을 톡톡히 해낸 허남준 배우의 열연이 돋보여 더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펼쳐질 너의 세계
2010년대 드라마를 보면서 덕후 생활을 키워왔던 내게, 오랜만에 금토를 기다리게 해준 낭만을 선사해준 작품이다. 매일이 치열한 나날 중 한 잔의 맥주 같달까. 판타지 같은 일들이 감히 현실이 될 거라는 상상은 이제 정말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기적이 누구 한 명에게라도 있으면 이루어진다는 듯 다시 믿고 싶어지게 만든 드라마였다. 내 다음 드라마와 앞으로 있을 나의 이야기들까지 기대하게 해주는, 오랜만에 행복한 작품이었다. 동화처럼 유치하지만, 그 유치함을 잃지 않아야 지킬 수 있는 사랑의 순수함을 오뉴월의 서리만큼이나 알려준 이야기였다.
"힘없는 증표 대신 온기가 필요하다고, 딱 한 걸음의 용기가 결국은 살게 한다고, 살아내기만 하면 기어코 오고야 만다고, 그리하여 어떤 세계가 그대 앞에 멋지게 펼쳐지고야 말 거라고."
- 멋진 신세계 14화 엔딩 中
나에게도 그런 세계가 펼쳐질 거라고, 이 드라마와 서리와 차세계가 보여주는 그들의 멋진 신세계가 나 또한 그런 소망을 계속해서 빌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다시, 사랑을 염치도 없이 믿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