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두운 방 안, 노트북 하나와 함께 조용한 감상이 시작된다. 이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영화 감상의 시간이다.
일본 영화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와이 슌지 두 사람의 영향이 컸다. 나는 그들의 작품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일본 영화라는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다. 10대에는 <하나와 앨리스> 속에서 나의 학창 시절을 겹쳐 보았고, 20대 초에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며 여행의 감각을 처음으로 일깨우기도 했다. 후반에는 <어느 가족>과 <브로커>를 통해 가족이라는 의미를 다시 정의하게 되었다. 나에게 일본 영화들은 단순한 취향을 넘어 정서의 일부, 그리고 하나의 세계관이다.
사카모토 유지를 알게 된 것은 또 하나의 세계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2023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을 보고 난 뒤 비로소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그가 어떤 이야기를 써온 사람인지 궁금해 그의 작품들을 하나씩 찾아보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는 일본 로맨스 영화의 대표작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각본가이기도 했다.
지난 6월 어느 날 그의 새로운 각본작이 개봉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그에 앞서 전작 <첫번째 키스>를 먼저 감상했다. 그 여운을 품은 채, 그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다음날 극장을 찾았다.

새로운 개봉작 <짝사랑 세계>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어린 세 소녀가 유령이 된 뒤에 성장하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살아가는 청춘 판타지 영화이다. 사실 처음에는 제목만으로 큰 끌림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전작에서 보여준 사카모토 유지의 섬세한 스토리텔링을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기대를 품게 되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짝사랑 세계라는 제목은 처음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단순히 막연한 짝사랑을 그린 이야기라 생각했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세 인물들의 마음을 가장 솔직하게 담아낸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초등학교 어린이 합창단 연습 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세 소녀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세 사람은 해마다 나이를 먹으며 성장해 어느덧 20대가 되고, 직장인과 사육사 그리고 대학생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현실과는 다른 세계에서 이어지는 그들의 일상은 낯설면서도 평범하다.

세 사람에게는 살아 있을 때 미처 꺼내지 못한 마음이 남아 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건네지 못한 고백, 엄마에게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사랑 그리고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 이를 향한 거친 분노까지. 영화는 그렇게 가슴속에 오래 머물러 있던 감정들을 각자의 성장 과정 속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짝사랑”은 단순히 누군가를 혼자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마음속에 오래 남겨둔 닿지 못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처럼 다가온다.
구름이 흩어진 하늘에서
꽃잎이 내려와 쌓이고
미래는 언제나 너를 기다리고 있어
계속 걸어 나가자 계속 노래를 하자
가슴이 뛰는 곳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너를 부를 거야
목소리는 바람, 바람은 꿈, 날아라, 높이 날아가라
영원의 저 끝까지 약속해
똑바로 서서 널 좋아한다고
잘 지내, 잘 지내야 해 안녕 다시 만나
- '목소리는 바람'의 가사 일부
영화의 감정을 가장 깊게 만드는 것은 후반부에 흐르는 삽입곡 '목소리는 바람'이다. 세 친구가 초등학생들과 함께 끝내 이루지 못했던 합창을 부르는 장면에서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다. 문득 ‘언젠가 이 노래를 들어도 더 이상 가슴이 아리지 않는 날이 올까.’ 라는 생각을 했다.
“잘 지내. 잘 지내야해. 안녕 다시 만나.”
이 짧은 가사는 그들이 마음을 전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처럼 들렸다. 사랑하지만 닿을 수 없는 세계, 표현하고 싶었지만 끝내 남겨둘 수밖에 수밖에 없었던 마음들. 짝사랑의 형태로 영원히 닿지 못한다.

이 영화는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영화가 향하는 곳은 전혀 슬픔만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잘 지내” 라고 조용히 말을 건네는 영화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영화를 통해서 왜 많은 사람들이 사카모토 유지의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이번에도 거창한 해답 대신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시간이 흘러도 그 마음은 누군가 기억 속에서 오래 살아날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
어두운 방 안, 노트북 함께 조용한 감상이 시작된다. 이것이 내가 이 영화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