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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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비쳐 반짝거리는 와인잔. 수영장 위에 떠있는 하루살이들. 흘러나오는 노래에 따로 맞추지 않아도 같은 춤을 추던 시간. 펜션 마당의 모기향 냄새. 발바닥에 붙었다 말라 떨어지는 나무 바닥.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의미 없어진 물장난. 평상 위에 널브러진 수건들. 디카 화면 속에서 정지된, 다들 웃다가 아무렇게 찍힌 표정들. 모닥불 연기에 얼굴이 벌겋게 뜨거워져도 그대로 앉았던 자리.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일부로 촌스러운 케이팝 노래를 틀고 내달렸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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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는 항상 이런 식으로 일상을 흔든 채 끝이 난다. 일상과는 완전히 무관한 장소에서 펼쳐지는, 그곳에서 끝난 채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와야만 하는 시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도, 애프터썬의 소피도 그런 여름에 놓여 있다. 두 영화 다 그 여름이 어떻게 시작되고 깊어졌는지 차근차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정서의 조각들만 늘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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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인물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탈리아 별장의 한 여름, 엘리오와 올리버 사이에 흐르는 공기만 있다. 복숭아밭 사이를 걷는 발걸음. 강물에 발을 담그는 소리. 자전거 페달을 밟는 다리, 헛돌다가 다시 균형을 잡는 순간. 별장 마당의 그늘 아래 책을 읽다가 건너오는 시선. 식탁 위의 살구, 나눠 먹다가 스치는 손가락. 화장실 물소리가 우울한 자리, Love My Way에 맞춰 춤을 추던 사람들. 나란히 걷는 마을의 좁은 길, 맞잡았던 딱딱한 유물의 손. 따뜻한 손끝이 스치고도 모른 척하는 순간들. 그 사이에 둘이 어떻게 가까워졌는지, 어느 대화에서 마음이 기울었는지 영화는 짚어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르는, 예측할 수밖에 없는 둘만의 흐름이 정서를 더 짙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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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름이 끝나면 올리버는 미국으로 돌아간다. 날짜가 정해진 이별을 알면서도 두 사람은 그 안에서 사랑을 나눈다. 기차역의 플랫폼. 혼자 돌아오는 길의 차창. 크리스마스에 걸려온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 곧 결혼한다는 그의 소식. 벽난로 앞에서 무너지는 얼굴을 카메라는 오래도록 붙잡는다. 그 얼굴만을 마주한 채로 영화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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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은 훨씬 더 과거의 기억을 흔든다. 영화는 성인이 된 소피의 머릿속에 흩어진 채로 떠다니는 기억들을 보여준다. 호텔 방, 수영장, 클럽, 공항이 온통 뒤섞인 채 소피의 세상은 아버지 캘럼을 중심으로 흐른다. 자외선 차단제를 발라주는 손. 등을 다 가리지 못해 혼자 바르려다 아버지한테 뺏기는 작은 손. 호신술을 가르쳐주던 커다란 팔. 서로의 얼굴에 묻은 모래와 물기를 닦아주던 손길. 그 다정함의 조각들 사이로 따사로운 햇살이 비친다. 같은 하늘을 나눈다는 게 참 좋지 않냐는 어린 소피의 말. 번쩍이는 클럽 한가운데서 신체 일부만 잡히던 아빠의 흐릿한 춤. 어느 날 밤 아빠가 사라져서 호텔 로비에서 잠들어야 했던 기억.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의 마음, 지금도 아마 이해하지도 묻지도 못할, 우는 나의 아기를 붙잡은 채 나의 부모를 떠올리며. 꺼진 TV 모니터에 비친 나와 아빠. 유리창에 겹쳐 비치는 그림자. 자꾸 반사된 모습으로, 가려진 모습으로, 내가 아버지를 보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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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럼이 흔들리고 있다는 건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밤마다 혼자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 카펫에 기대어서 온몸에 힘을 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설명 없이 이미지로만 지나간다. 분에 넘치는 카펫을 사고 돌아서는 발걸음. 술잔을 비우고 또 채우는 손. 바닷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 그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카메라. 캘럼은 비디오로도 수중카메라로도 딸을 계속 찍고, 딸도 작은 카메라를 들고 아버지를 따라다닌다. 일부만 담을 수 있는 기억장치처럼 계속 서로를 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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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흔들리던 그도 딸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서있었다. 나한테는 무슨 얘기든 해도 된다고, 나중에 나이 들어서도. 캘럼이 소피에게 남긴 이 대사가 영화에서 가장 또렷하게 남는다. 엘리오의 아버지도 비슷한 자리에서 비슷한 말을 건넸다. 지나가는 여름을 부정하지 말고, 그 안에서 느낀 모든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라고. 두 영화 모두 휴가지에서 만난 낯선 인연이 등장하지만, 결국 숙소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낮에 또래 남자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우연히 마주친 언니에게 자유이용 팔찌를 건네 받은 소피도 결국은 방에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눕는다. 엘리오는 거실 소파에서 아버지와 그 여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둘 다 곧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지 않을 나이가 올 것이다. 성인이 된 소피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따뜻한 말은 다른 장면들과 뒤섞이고 흐려진 채로 떠 있고, 엔딩의 엘리오는 겨울에도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그 대화로 남은 정서는 그들의 삶에 비선형적으로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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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 휴가도 돌아오자마자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금방 흐려진다. 사진은 그 순간의 빛과 표정만 붙잡고, 소리와 향기, 그 자리의 온도는 남기지 않는다. 사진을 다시 들여다볼 때마다 사진에는 없는 말들이 떠오르지만, 그것도 곧 휘발될 정보일 뿐이다. 누구 표정이 제일 이상하게 찍혔는지를 두고 단톡방에서 이야기하고 스쳐 지나갈 것이다. 종종 작년에 무엇을 했는지 찾아보다가 마주한 사진에 웃고 지나칠 것이다. 평생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이렇게 가볍게 쌓인다. 어딘지 모를 곳에 서서히 쌓인다. 정확한 장면은 다 빠져나가도, 거기 무언가 있었다는 자국만은 지워지지 않고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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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파편만 남은 채 영상을 돌려보며 웃는다. 되돌려지는 테이프. 화면 속에서 멈췄다가 다시 재생되는 여름. 캠코더도 디카도 용량이 차면 결국 어딘가를 지워야 한다. 사람의 머릿속도 다르지 않아서 매일 많은 것들이 지워진다. 사람에게서 지워진 기억은 어디로 갈까. 지워진 줄 알았던 장면도 계속 굴러다니다가, 비슷한 여름 냄새나 비슷한 노래 한 소절에 불쑥 다시 재생된다. 물리적인 실체는 없지만 분명 어딘가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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