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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사랑의 해체와 재조립 - 연극 ‘로테/운수’ [공연]

롯데와 아내, ‘로테’와 ‘운수’라는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다

by 이진 에디터
2026.06.07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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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my hand. Take my whole life, too. For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엘비스 프레슬리가 1961년 발표한 곡 ‘Can't Help Falling in Love’ 노래 가사다. 감미로운 선율과 아름다운 노랫말로 지금도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곡은 결혼식 축가로 쓰일 정도다.


낭만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Can't Help Falling in Love’를 연극 <로테/운수>는 극 시작 전후에 흐르는 배경음악으로 사용한다. 회백색 무대는 의자와 페인트 통 외엔 소품이 거의 아무것도 없이 심플하다. 벽 위엔 ‘본 공연에는 스토킹 범죄와 가정폭력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란 자막이 떠 있다. 티켓 뒤편엔 ‘당신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면’이란 글씨와 여성긴급전화(1366)의 연락처가 기재돼 있다.


연극 <로테/운수>는 사랑이란 이름 아래 자행되는 스토킹과 가정폭력 문제를 조명한 여성주의 연극이다. 괴테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현진건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여성 주인공들인 ‘롯데’와 ‘아내’는 ‘로테’와 ‘운수’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


롯데를 짝사랑하다 결국 목숨을 버리는 베르테르의 마음을 순정·낭만·서정적으로 묘사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가난한 인력거꾼의 하루짜리 행운을 비극으로 풀어낸 <운수 좋은 날>은 모두 남성 주인공들인 베르테르와 김첨지 시점에서 쓰였다. 해당 소설들에선 롯데와 아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베르테르와 김첨지 마음만큼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그들의 삶이 실제라고 가정해 보자. 철저히 남자의 시선에서 그려진 소설 속 여성들은, 자신이 온전히 사랑받는 ‘여주인공’이라고만 느꼈을까. 우린 과연 연극 시작 전후 배경음악 ‘Can't Help Falling in Love’를 이전처럼 로맨틱하게만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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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인 짝사랑을 당하는 롯데는 베르테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트리거가 된다. 소설이 출간된 1774년 유럽의 보수적인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롯데는 베르테르가 떠난 후 어떤 삶을 살았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김첨지는 소설 내내 아내에게 폭언과 폭행을 행사한다. 벗어날 수 없는 끈질긴 가난과 불안한 내면, 갑작스레 찾아온 큰 행운, 아픈 아내를 속으론 애틋하게 여기고 있었단 작은 반전까지. 능력 없고 못났지만 소설 인물로서는 내면 묘사가 풍부하고 캐릭터도 입체적이다. 그럼에도 남편의 폭언과 폭행,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조차 없는 가난에 시달리다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아내의 내면은 누구 하나 살피지 않았다. 이에 로테와 운수의 내면을 촘촘히 묘사하는 연극 <로테/운수>는 시대를 현대 대한민국으로 옮겨 동시대성을 부여했다.


낙성대 미술사학과 부교수 로테는 혼자 사는 30대 여성이다. 남자 교수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쌓은 로테 남자 친구는 대기업 과장이다. 집에 푸른 리본을 맨 붉은 장미가 매일 하나씩 배달되자 로테는 남자 친구의 귀여운 이벤트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꽃을 선물한 건 그가 아니었다. 로테에게 경찰은 ‘인기가 많으신가 보다’라 한다. 엄마에게 털어놔도 소용없다. ‘그러게 왜 나가서 사느냐’, ‘남자 물건 좀 두지 그랬냐’라 타박하는 엄마는, 같은 여성이라기보다 딸자식을 타박하는 구세대 어른일 뿐이다.


스토커는 20대 초반 제자 ‘베르테르’였다. 로테를 도촬하고, 집까지 침입했던 베르테르는 경찰서에서 심약하게 운다. 혼자 갔을 땐 무시했던 경찰은 로테가 남자 친구와 동행하니 바로 도와준다. 남자 친구는 이젠 내가 지켜준다며 경찰서 앞에서 청혼하고, 지켜보는 이들은 ‘굉장한 테토남’이라 칭찬한다. 로테는 자신이 왜 테토남에게 보호받아야 하는지 어이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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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를 고소한 로테의 사연은 사람들 입과 언론에 자극적으로 오르내리고, 베르테르 엄마는 집에 찾아와 고소를 취하해달라 빈다. 우리 애는 아직 살아갈 날이 많다면서. 결국 베르테르는 원작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들의 이야기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제목으로 출간된다. 로테는 정신과에서 과대망상 진단을 받는다.


1인극에 가까운 ‘로테’ 에피소드는 그가 느꼈을 고립감과 공포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 정신과 의사·엄마·남자 친구·베르테르·베르테르 엄마의 대사는 벽 위 자막으로만 보여진다. 그들 중 누구도 아닌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성은, 흰 바닥에 검은 페인트칠을 하며 로테의 자리를 좁힌다. 상황이 악화할수록 넓어지는 검은 바닥은 로테를 구석으로 몰아간다. 공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여성은 페인트 통을 엎고, 하얗던 로테의 마음은 새까맣게 물든다. 하얀 바닥이 검게 변한 건 순식간이었지만, 까매진 마음과 일상은 예전으로 돌아가긴 힘들 것이다.

 

속도감 있고 현실적인 톤에 풍자와 해학 요소도 있던 로테 에피소드와는 달리, ‘운수’ 에피소드는 폭력은 현실적이지만 공포는 판타지적이다. 도예가 운수는 택시 기사 남편 김첨지의 머리를 뚝배기로 수차례 가격해 살해한 혐의로 재판받는다. 운수는 로테 에피소드에서 까맣게 변한 무대 바닥에 의자를 놓고 앉는다. 옆엔 김첨지의 유령인지, 운수의 내면인지 모를 존재가 기괴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욕설을 퍼붓고, 벽에 검은 페인트로 낙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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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해, 말을. 오라질 년. 말을 해, 말을 해, 말을 해, 말, 말, 말. 사랑해.’


<운수 좋은 날> 소설 김첨지 대사가 운수의 영혼을 좀먹는 공포와 불안, 정신병적 증세로까지 형상화됐다. 로테 에피소드에선 페인트로 바닥을 칠하는 연출이 로테의 사회적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묘사한 것이라면, 운수에서 미지의 존재가 김첨지가 생전에 했던 말을 벽에 마구잡이로 쓰는 건 자기혐오를 뜻한다. 운수가 남편을 살해하는 모습을 재현할 때, 미지의 존재는 살인을 부추기면서도 공포에 떠는 그를 안아주기 때문이다. 과격하고, 파괴적이고, 거친 미지의 존재는 무력하고 연약한 피해자 운수의 내면이었다.


운수도 소설 속 아내처럼 욕을 듣고, 폭행을 당했으며, 병원도 못 갔다. 직업이 있던 운수는 자립할 능력이 있었지만, 가정폭력에서 달아나지 못했다. 로테 에피소드 경찰처럼 무신경한 경찰은 도움이 안 되고, 만신창이인 몸과 정신은 운수를 집에 가뒀다. 살인은 정당방위라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했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운수가 죽었을 테니까.


로테·운수 에피소드 모두 해결책을 제시하진 않았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란 사회 현상과 문제의식을 극단적으로 시각화해 보여줄 뿐이었다. 여자가 혼자 살거나 사회생활을 하며 겪는 고난을 현실적으로 보여준 로테 에피소드와는 달리, 운수 에피소드는 시대·시점·직업 변화 외엔 원작과 거의 같다. 김첨지의 욕설을 여성의 입으로 내뱉고 벽에 쓰는 운수 내면을 보여주는 연출이 서사의 각색보다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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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로테/운수>엔 다양한 남성 캐릭터들이 간접 등장한다. 로테 스토커 베르테르·로테 남자 친구·경찰·로테만 회식 2차에서 배제하는 남자 교수들·운수 남편 김첨지·법정 판사들까지. 이들은 악인, 방관자, 뻔한 보통 남자, 좋은 사람인 척하지만 역시나 뻔한 남자로 분류된다.


베르테르·김첨지 또한 다른 곳에선 평범한 남자였을 것이다. 오히려 형편없이 나약한 인간이기에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로 자신을 증명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들이 행하는 폭력은 한 인간의 인생을 파괴할 정도로 강력했다.


살다 보면 남자와 얽힐 수밖에 없다. 모든 여성은 아버지로부터 태어났고, 가족·지인·동료·친구들도 남성이며, 이성애자·양성애자일 경우 남자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로테와 운수 또한 폭력의 피해자이면서도 남자 친구와 김첨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로테와 운수를 탓하면 안 된다. 로테와 운수가 겪은 일은 여성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연극 <로테/운수>는 고전의 재해석, 여성들이 겪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과 동시에 피해자가 완전무결해야 할 이유는 없단 메시지도 함께 전했다. 다치고 상처 입었지만, 로테와 운수는 부당한 폭력에서 저항했기에 살아남았다. 그렇기에 무대를 잠식하는 검은색 칠이 그들의 삶 전체까지 새까맣게 물들이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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