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여행을 떠올리면 반사적으로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 같은 거대 미술관들이 스쳐 지나간다. 방대한 작품들에 둘러싸여 시대를 뛰어넘는 큰 역사의 물줄기를 마주하는 것은 분명 웅장하고 경이로운 일이다. 하지만 관광지로서의 대형 미술관 방문은 종종 고된 숙제처럼 느껴지곤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줄을 서고, 복작복작한 인파를 피해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그림을 눈에 담고, 정해진 시간 안에 이 많은 걸 다 봐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이른바 ‘타임어택’. 백과사전을 훑어보듯 정신없이 흘러가는 그 속에서 한 작가, 한 작품과 내밀하게 대면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한산하고 조용한 골목길의 작은 갤러리에서, 한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작가와 나 단둘이 깊이 있게 만나는 고요한 경험이 더 짙은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신간 <파리의 작은 미술관>은 바로 그 고요하고 깊이 있는 경험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책이다.
저자 김정화는 15년간 파리에 살았던 기억을 뒤로하고, 학문적 지식이나 인생의 교훈을 얻겠다는 목적 없이 그저 천천히 걷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다시 파리의 골목길을 찾았다. 저자에게 골목길에 숨은 작은 미술관들은 "보고 싶은 사람들이 나누는 은밀한 약속 장소"였다. 이 책은 딱딱한 미술사 도록이 아니다. 저자가 직접 휴대전화로 걷는 길과 미술관의 풍경을 찍은 사진들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파리에 사는 오랜 친구가 “나 지금 숲길 끝에 있는 미술관에 왔는데, 이 그림 좀 봐”라며 다정하게 사진을 보내주고 조곤조곤 설명해 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기존의 무거운 미술 서적과는 다르게, 방구석에 앉아서도 파리의 골목을 함께 여행하는 듯한 친근함과 묘한 몰입감이 책장 사이사이에서 배어난다.
작품이 아닌 '공간'과 '시간'을 읽는 법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그림을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술관이라는 '공간 자체'를 하나의 텍스트로 읽어낸다는 점이다. 크고 화려한 유리 피라미드를 한 발짝 벗어나면, 화가의 손때 묻은 작업 도구와 삐걱이는 마룻바닥, 그리고 치열했던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가장 사적인 공간이 나타난다. 거창한 미술사가 아니라 예술가가 실제로 숨 쉬며 살았던 '진짜 일상' 속으로 쑥 들어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오랜 시간 파리에서 문학과 미술을 공부한 저자는 들라크루아, 로댕, 모네, 피카소 등 거장들의 마지막 숨결이 남은 작업실이나 저택이 어떻게 미술관으로 탈바꿈했는지 추적한다. 작가가 살아생전 벽을 칠했던 페인트 색깔, 작품이 배치된 위치, 심지어 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방향과 동선까지. 알고 보면 이 사소해 보이는 모든 것들이 '이 순서대로, 이런 느낌으로 내 그림을 봐주었으면' 하고 남겨둔 예술가의 숨겨진 의도들이다. 공간의 흐름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예술가라는 사람 자체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작품을 '보는' 것을 넘어 전시를 '읽어내는' 새로운 시선을 획득하게 된다.
골목길에서 만나는 일곱 개의 우주
책 속에는 상속세로 만들어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피카소 컬렉션(피카소 미술관)부터 책상 위 먼지 하나까지 복원한 작업실(자코메티 미술관)까지 흥미로운 사연을 품은 공간들이 등장한다.
특히 인상 깊었던 곳은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의 이야기다. 이 미술관의 탄생 비화는 한 편의 유쾌한 코미디이자 역사의 아이러니 그 자체다. 미술관의 설립자인 부호 폴 마르모탕은 새로운 화풍인 인상주의를 끔찍하게 혐오해서 "붓질만 마구잡이로 한 걸 예술이라 부를 수 있냐"며 맹비난했던 뼛속까지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전통 미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저택을 가장 보수적인 기관인 '예술원'에 기증했는데, 훗날 시대의 흐름이 바뀌며 이 미술관에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비롯한 인상주의 작품들이 대거 기증되는 반전이 일어났다. 자신이 그토록 비웃던 화가 '모네'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 옆에 평생 나란히 붙어 전 세계 최대의 인상주의 미술관으로 불리게 될 줄, 무덤 속의 마르모탕은 상상이나 했을까?
더욱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이 미술관에 걸린 그림들을 통해 19세기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던 시대의 굴레를 치밀하게 읽어낸다는 것이다. 여성은 정식 미술 학교에 갈 수 없어 남성 누드 석고상을 뒤로 돌려놓고 사설 수업을 들어야 했던 촌극 같은 풍경, 아버지가 권하는 '책'과 어머니 곁에 놓인 '바느질감' 사이에서 망설이는 딸의 모습 등 그림 속 사소한 소품 하나하나가 당시의 억압적인 시대상을 증언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끝에서 우리는 부르주아 여성의 굴레를 거부하고 끝내 인상주의 화가로 우뚝 선 '베르트 모리조'의 작고도 강렬한 초상화를 마주하게 된다. 마네가 그린 그녀의 초상화 속, 정면을 응시하는 굳센 눈빛은 그 어떤 화려한 풍경화보다 깊은 인상을 남긴다. 위대한 예술은 혐오도, 시대의 차별도 결국 넘어서고 만다는 사실이 골목길 산책에 묘한 짜릿함을 더해준다.
이처럼 책은 예술가들이 앞서 걸어간 길을 차근차근 따라 걷게 만들며, 그들이 사랑하고 고뇌했던 골목길의 숨결을 그대로 전해준다.
가장 사적인 파리 여행을 마치며
<파리의 작은 미술관>은 예술가의 생애와 그들의 작품,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건축적 공간을 하나의 유려한 서사로 엮어낸다. 화가의 삶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니, 그들의 그림이 그저 캔버스 위의 물감이 아니라 치열했던 삶의 흔적으로 다가와 훨씬 깊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살 수 있었다면, 그 후 일생 동안 어디를 가든 파리는 당신과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이 책을 덮고 나면, 비록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머무를 수는 없더라도 거장들과 함께 파리의 골목길을 걷고 그들의 작업실에서 차를 한잔 나눈 듯한 충만함이 남는다.
화려한 대로 뒤편, 파리의 진짜 내밀한 얼굴이 궁금한 이들에게, 그리고 대형 미술관의 인파에 지쳐 '나만의 조용한 예술 공간'을 갈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다정한 예술 산책을 강력히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