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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홀로 남겨진 뉴욕의 카우보이 [영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드러내는 영화

by 한소현 에디터
2026.06.0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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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40년대, 거대 제작사를 중심으로 호황기를 누렸던 미국 영화 산업은 과도기를 겪으며 1960-70년대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그 배경에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인 움직임이 작동했다.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은 대외적으로 베트남 전쟁의 참혹한 패배를, 대내적으로는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인한 국가 시스템의 붕괴를 지켜봤다. 그 결과, 국가적 패배감과 국가 시스템에 대한 불신에 휩싸인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의 위선에 반항하기 시작하면서 ‘쳥년 문화’가 급격히 확장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새로운 영화 운동이 바로 ‘아메리칸뉴웨이브’다. ‘아메리칸뉴웨이브’는 아메리칸드림의 환상을 심어주던 기존 할리우드 영화의 공식을 거부하고, 그 허상을 폭로하며 날 것의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할리우드의 매끄러운 연속 편집과 닫힌 형식의 이야기 구조 대신 유럽 영화의 혁신적인 문법을 적극 수용했으며, 아름답고 인위적인 세계 뒤에 숨은 폭력의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화면에 담아냈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드라이버’는 ‘아메리칸뉴웨이브’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본편은 뉴욕을 배경으로 평범한 청년이었던 트래비스가 광란의 카우보이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화려함 뒤에 가려진 뉴욕의 황폐한 실상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극 전반에 흐르는 시점 쇼트와 1인칭 내레이션은 (뉴욕의 밤거리를 오물이 가득한 곳이라 말하는) 트래비스의 시선으로 거리를 바라보게 만들며,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주인공 트래비스는 베트남 참전 용사이자 뉴욕 맨해튼에 거주하고 있는 평범한 26세 청년이다. 영화는 트래비스가 택시 운전사로 취직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5월 10일.


근무 시간은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주 6일이나 7일 일한다 힘들긴 해도 할 일이 있다.

주 300에서 350불 수입에 미터기를 안 꺾으면 더 벌 수도 있다.


원하면 어디든 간다.

브롱크스, 브루클린, 할렘까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

흑인을 안 태우는 기사도 있지만 난 아무렇지 않다.

 

 

트래비스는 손님이 원하면 어디든 가는 택시 운전사다. 그의 동선을 따라 카메라는 브롱크스, 브루클린, 할렘 등 뉴욕의 구석구석을 누빈다. 대도시의 화려함과는 대비되는, 가장 날 것의 장면들이 화면에 포착된다.

 

 

쓰레기는 밤에 쏟아져 나온다.

매춘부, 깡패, 남창, 호모, 게이, 마약 중독자 등등.

인간 말종들이다.

언젠가 저런 쓰레기를 씻어내 버릴 비가 쏟아질 것이다.

 

 

트래비스는 뉴욕의 밤거리를 쓰레기들이 즐비한 곳이라 비난하며, 언젠가 이 오물들을 씻어내 줄 비가 내리기를 바란다. 영화는 철저하게 현재에 머물기 때문에 그의 증오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오프닝부터 그가 베트남전 퇴역 군인이라는 사실을 명시함으로써, 전장의 기억과 외상후스트레스가 그의 삶에 깊은 얼룩을 남겼음을 짐작하게 한다. 트래비스는 종전 이후 거대한 무력감에 짓눌려 있던 당시 미국 청년 세대의 일그러진 초상인 셈이다. 


트래비스의 결핍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서서히 드러나는데, 이를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매개는 다름 아닌 ‘자본과 화폐의 허무함’이다. 택시 운전사로 일하는 트래비스는 성실히 일한 대가로 적절한 보상을 받는다. 영화에서 그는 단 한 번도 돈 걱정을 하거나 푸념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러나 트래비스에게 중요한 것은 지불한 값에 대한 온전한 보상이 따라오느냐의 문제다. 이를 테면 근무를 마친 뒤, 포르노 극장을 찾은 트래비스가 카운터 직원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직원의 단호하고 기계적인 태도에 머쓱해진 그는 옆에 놓인 간식을 주문하기 시작한다.

 

 

트래비스: 사탕 하나 줘요. 쥬쥬 있어요? 큰 걸로.

직원: 이것뿐인데요.


트래비스: 코카콜라 한 잔도.

직원: 로열크라운 콜라뿐이에요.

 

 

트래비스는 주 6일, 하루 12시간을 일하며 번 돈으로 정작 자신이 원치 않는 브랜드의 사탕과 콜라를 삼켜야 하는 것이다. 돈을 벌어도, 돈을 써도 채워지지 않는 지독한 공허함이 그를 괴롭힌다. 특히 택시를 운행할 때마다 올라가는 미터기의 숫자는 이를 잘 보여주는 직관적인 매개체다. 미터기에 돈이 쌓여갈수록 그가 느끼는 소외감과 증오의 총량은 커져간다.

 

 

택시2.jpg

 

 

트래비스의 분노는 배시라는 한 여인을 만나며 방향을 튼다. 배시는 차기 대통령 팔렌타인의 선거캠프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트래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얀 원피스를 입은 천사’같은 존재다. 트래비스는 ‘쓰레기같은 뉴욕’에 나타난 ‘순결한 천사’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휩싸여 배시에게 다가간다. 거침없고 당돌한 트래비스의 태도에 묘한 매력을 느낀 배시가 데이트를 수락하며 둘은 가까워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취미라곤 포르노 영화 관람이 전부였던 트래비스는 첫 데이트 장소로 포르노 극장을 선택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결국 배시는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리고, 배시를 향했던 트래비스의 감정은 덩그러니 뉴욕 거리의 한복판에 남겨진다.

 

 

의욕을 상실했어. 빠져나가서 뭔가를 하고 싶어.

여길 빠져나가 정말로... 뭔가를 하고 싶어.

 

 

배시에게 거절당한 후 방향을 잃은 그의 감정은 우연히 마주친 어린 소녀 아이리스에게로 향한다. 트래비스는 12살의 나이에 매춘을 하는 아이리스를 구해야 한다는 정의감에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다. 이때 아이리스를 데리고 있는 포주 스포트가 트래비스에게 건네는 장난 섞인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진짜 카우보이야? 그럼 한시름 놨고”
 

 

고전 서부극에서 카우보이는 야만인(인디언)으로부터 납치된 순결한 백인 여성을 구출해내는 정의로운 영웅이자, 미국의 식민지 개척 역사를 문명화로 합리화하는 핵심 축이었다. 포주로부터 아이리스를 빼내려는 트래비스의 시도는 얼핏 이 고전 서부극의 신화를 그대로 모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출대상인 아이리스가 구출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 트래비스의 행위는 정의를 실현하는 영웅의 모습을 빗겨나간다. 트래비스가 심취해 있는 서부극 신화는 단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기 위한 뒤틀린 욕망의 발현일 뿐이다. 이처럼 본편은 서부극의 전형적인 플롯을 전복시키면서 트래비스를 조롱한다. 


비록 결말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영화는 트래비스에 대한 처벌(죽음)로 끝나면서 그의 행위를 결코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기묘한 성취는 트래비스를 제거해야 할 절대 악이 아닌 극단적 고립에 빠진 한 개인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감독의 섬세한 연출은 (해석이 분분한) 영화의 결말처럼 폭력의 쾌감에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을 트래비스의 내면으로 초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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