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을 못 가게 됐다. 열여덟, 프랑스 화보에 실린 에펠탑 사진을 뜯어 방 벽지에 붙였다. 수년이 흘러도 한밤의 에펠탑은 녹슬지 않은 꿈을 떠안고, 3평 남짓한 방에서 반짝였다.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는 굴레에서 허덕이다 마침내 여행 계획을 세웠다. 가장 친한 친구 S의 추진력 덕분이었다. 쥐가 들끓고 지린내가 진동한다, 음식은 너무 비싸고 석회수 때문에 피부가 뒤집어졌다….악명 높은 여행 후기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머리를 싸매가며 최저가 항공을 검색했다.
"야, 그래도 모나리자는 한번 봐야지 않겠냐."
"난 그냥 거리만 걸어도 재밌을 것 같아."
S는 한껏 들떠선 가고 싶은 명소를 줄줄이 읊었다. 숙박 앱을 돌려가며 숙소를 검색하고 여행 경비를 맞추던 S였다. S는 습관처럼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를 내뱉었다. 여기가 아니면 다 좋다고 말하는 S의 눈에는 마치 몇 리터의 눈물이 고여있는 듯했다. S의 눈동자는 센강(Seine River)을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실 유럽 여행을 꼭 가야 하나? 고민에 잠겨있던 참이었다. 막상 계획을 세우니 경비가 생각보다 많이 들었고, 모아둔 돈을 쏟아붓기엔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잔뜩 부풀어 있는 S의 기대감을 져버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 한 번 사는 인생 유럽은 가봐야지-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S로부터 메시지를 받기 전까지는.
1. 난 네가 푹 쉬는 게 더 좋아
- 주현, 나 갑자기 위경련 와서 택시 타고 응급실 감.
S는 자주 배가 아팠다. 속이 안 좋다고 호소한 지 1년은 넘은 것 같았다. 위경련, 응급실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놀라서 답장을 마구 쏟아냈다. 괜찮은 거냐, 어쩌다가 그랬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냐, 폭풍 카톡을 했다.
- 너, 담석증인 거 아니야?
S가 등허리 윗부분이 아프다고 그랬다. 갑자기 머릿속에 담석증이라는 단어가 스쳤다. 제미나이에 S가 지금껏 호소한 증상과, 내가 의심하는 병명을 들려주었다. 제미나이는 그녀의 증상이 담석증과 매우 흡사하다고 했다.
- 주현아 네가 용한 것 같아.
S는 진짜 담석증이 맞았다. 쓸개가 팅팅 부어서 당장 수술을 해야 하고, 위내시경도 받아야 한다고. S가 먼저 여행을 무르자는 이야기를 안 꺼내길래, 망설이다 카톡을 보냈다.
- 우리 유럽 여행 보류하고, 그냥 너 괜찮아지면 국내 여행 가자! 난 네가 푹 쉬는 게 더 좋아.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 궁전이고 뭐고 S가 훨씬 소중했다.
- 너한테 너무 미안하다….
- 엥 아니야, 난 진짜 괜찮음. 네가 얼른 나아라…. ㅜㅜ
내게 사과하는 S를 두고, 문득 지난 12월 즉흥으로 떠난 제주 여행이 떠올랐다. 바닷물이 밀려오는 해변가에 실수로 새긴 숫자가.
2. 우정 이상의 무엇무엇
2025년은 내게 여러 터닝 포인트를 안겨다 준 해였다. 편입 시험에 합격하고 새로운 학문을 배우게 됐다. 애인과 헤어지고 몸무게 앞자리가 뒤바뀔 정도로 끙끙 앓다가 재회했다. 그러곤 몇 달 더 사귀다 헤어졌다. 바람이 서서히 빠지는 풍선처럼 쪼그라든 마음으로 살았다. 대외 활동, 아르바이트, 학업에 치여 살다가 종강할 무렵 또 다른 사랑을 시작했다. 그런데, 상대는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기다릴게! 라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몇 달 안 가 이별했다. '펑' 요란하게 터지는 풍선이 아니라, 고요하게, 서서히….언제 풍선인 적 있었냐는 듯 쭈그러들어 '고무 조각'이 된 것처럼. 맥이 빠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썸을 타게 됐는데, 잘 안 풀렸다. 시험기간에 지피티를 붙잡고 심리 상담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가 초라했다.
- 지피티야, 내 인생은 왜 이럴까…. 내 짝이 있긴 한 걸까? 내가 문제인 걸까? 아 몰라 공부고 뭐고 그냥 떠나고 싶어~~~!!! 나한테 좀 정신 차리라고 마라맛 핵불닭 급 팩폭 좀 날려줘.
- 그래, 좋아. 각오해라, 핵불닭급 팩폭을 날려줄게. 너, 정신 차려. 지금 이러고 있을 때야? 내일이 시험이라며!
- (...) 정신이 확 드네.
어영부영 기말고사를 치고 나니 종강이었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나를 버리고 싶었다. 투기하고 싶었다. 잊고 싶었고, 지워지고 싶었고 잃어버리고 싶었다. 모든 걱정과 근심, 철없고 쪽팔린 일들이 집을 떠나면 잠깐이나마 지워질 것 같아서, 여행을 결심했다.
해외는 즉흥적으로 가긴 어려울 것 같아, 제주도행 비행기를 검색했다. 마침, S도 종강 시즌이라서 여행에 동참하겠다고 말했고, 우리는 당장 다음 날 오전 김포에서 제주로 나르는 '직항' 티켓만 결제했다.
S는 내게 우정 이상의 무언가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S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아끼고 응원하고 축복하고…. 무엇무엇 했다. 남자 친구가 몇백일을 만나는 동안 꽃 한 번 안 사준다고 말했더니, 갑자기 꽃다발을 사 들고 나타난다거나. 너 생각나서 샀다며 실바니안과 미피 굿즈를 건네준다거나. 속상해서 아무것도 안 먹었다는 내게 배달의 민족 쿠폰을 보내주는 그녀였다. 우리는 우정 이상의 무엇이었다.
3. 잘못 새겨진 숫자

딸랑 배낭 하나만 메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찾을 필요가 없었기에, 바로 밖으로 나갔다. 야자수가 줄줄이 놓인 풍경을 보자 꿈꾸는 기분이었다.
"야, 너 한라봉이랑 사진 안 찍니?"
"돌하르방이겠지."
여행 시작부터 날 웃기는 S였다. 양치 도구, 잠옷까지 깜빡하고 안 챙긴 S. 코팩을 클렌징폼으로 착각하고 들고 온 S. 돌하르방과 한라봉을 헷갈리는 S. 그런 S였지만 길은 나보다 잘 찾았다. 우리는 먼지 쌓인 공용 자전거를 빌려 탔고, S가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며 앞장서서 운전했다. 제주는 서울보다 훨씬 따뜻해서, 12월에도 꽃이 펴 있었다. 높고 푸른 하늘, 홀씨 같은 구름. 맑은 공기. 저 멀리 페달을 힘차게 밟는 S. 뭐가 그리 신나는지 가쁘게 웃느라 들썩이는 허파.

언제 세워졌는지도 모를 정류장에서 한참 버스를 기다려도 신났다. 알아듣기 힘든 제주 방언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 할아버지, 기사님. 창밖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 돌담, 바다. 바다, 바다, 바다. 어딜 달려도 보이는 파랑과 초록의 조화. '천천히'라는 경고 표지판마저도 '삶의 여유를 가져라'라는 위안처럼 읽히는 곳에서 나는 결국 찔끔 울고 말았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편안해 보이는 S의 얼굴이었다.

발바닥과 허리가 쑤셔도 무거운 가방을 멘 채 계속해서 걸었다. 핸드폰 스피커로 '제주도, 푸른 밤' 노래가 흘러나왔다. 하늘은 점차 어두워졌다. 서울과 달리 낮과 밤의 구분이 뚜렷한 제주였다. 그러니 땅과 하늘의 경계는 무뎌졌고 저녁 8시가 넘자, 온 거리가 까맸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하늘이 보이는 평야를 걷고 싶다.'
제주로 오기 전 일기에 적은 소원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나는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하늘이 보여서, 별이 눈앞에서 반짝였다. 손 뻗으며 닿을 것처럼.
"와아아 별 진짜 많이 보여~~~."
나는 미친 사람처럼 아무렇게나 춤을 췄다. S는 셔터를 눌렀다. 핸드폰 카메라 성능으로는 별을 찍을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 까만 배경에 별이 빛나고 있는 듯했다.

S가 해변에 날짜를 새기자고 했다. 나는 종이를 구겨, 모래사장에 숫자를 꾹꾹 눌러썼다.
2026. 12. 16.
S도 나도 2025년을 2026년이라고 썼다는 사실도 모른 채 깔깔 웃었다. 그리고, 날짜를 잘못 기재했다는 사실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야 깨달았다.
우리의 여행은 끝까지 얼렁뚱땅 이었다. 티켓 예매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건지,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타게 됐다.
"주현, 우리 운명 공동체를 달리했어."
"야, 그런 말 하지 마."
S의 말은 현실이 됐다. S가 타는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서 20분 정도 늦게 출발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결국, 나는 먼저 김포공항에 도착해 S를 기다렸다.

우리는 거창한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그냥 걸었고, 버스를 탔고, 자전거 페달을 밟다가 웃었다. 밤에는 캔 맥주 하나를 둘이서 나눠 마시고, 공포영화를 보다가 잠들었다. 평소에 하던 것을 그대로 했다. 그럼에도 마음속 응어리가 전부 녹아내린 기분이었다. 혼자였으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웃을 수 있었던 건 S의 존재 덕분이었다.
S와 나는 2025년을 2026년으로 새긴 해변가 사진을 보면서 약속했다. 정확히 2026년 12월 16일, 다시 제주 해변에 가기로.
어쩌면 여행이란 발견보단 '재발견'에 가깝단 생각이 든다. 새로운 걸 발견하고 싶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잊고 지냈던 무언가를 깨닫기 위해서 떠난 것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청춘과 우정을 재발견했다. S와 함께라면, 오래 본 동네에서도 새로운 풍경을 찾을 수 있다. 질리도록 걸은 거리도 새롭고, 이미 한 번 본 영화도 신선하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S가 보았으니까. S가 듣지 못한 것을 내가 들었으니까.
유럽은 못 가게 되었지만, 아무렴 괜찮다. S의 평안이 내겐 훨씬 더 중요하고, S만 있다면 동네를 걸어도 여행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