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시를 선물하고 싶다. 가장 내밀한 날 것의 감정을 언어라는 포장지로 소중하게 감싸 건네고 싶다. 상대가 어디에 쓸 물건인지 모르고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도 모른 척 시선을 돌리고 싶다.
오월 끝자락은 여름의 내음이 짙어지는 시기다. 사랑하기 좋은 나날. 그렇지 않은 날이 있겠느냐만. 세상 만물이 싱그러운 향기를 한껏 머금고 피어난다. 푸르른 잎사귀, 뜨거운 태양, 바람이 스치는 소리.
내가 가진 시집 중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읽어주고 싶은 시를 세 편 골랐다. 내가 멋대로 정한 부제는 ‘고백’이다. 세 명의 시인은 암호와 같은 문장을 적어 독자에게 전했고, 나는 고백의 시라고 멋대로 해석하여 또 다른 독자에게 전한다.
1. 사랑은 정지된 시간이 다시 흘러가는 장면처럼
하늘은 먹구름이다. 나무는 그림자다. 공은 허공에 떠 있다. 너는 의자에 앉아 있다. 바닥에 닿기 직전이다. 나무가 되기 직전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고백이 흐른다. 위에서 아래로. 꽃잎이 떨어진다. 이제 무엇이 오면 좋을까요. 물이 오면 좋겠어요. 말이 오면 좋겠어요. 말라가고 있었거든요. (……) 이제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건너가면 좋겠어요. 넘어가면 좋겠어요. 울고 싶어졌거든요. 살고 싶어졌거든요. 그림자가 지워지는 바닥이다. 흐르는 공 너머로 다시 깊어지는 여름이다. 공은 허공을 떠나고 있다. 꽃은 그림자로 맺힌다. 너는 의자에서 일어선다.
이제니, 「흐른다」 부분(『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먹구름이 끼인 흐린 하늘 아래 ‘너’는 그림자가 되기 직전의 상태로 앉아 있다. 허공에 떠 있는 공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너’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는 그저 ‘직전’의 상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정지된 이미지는 잿빛이다. ‘너’는 외롭다. 물을 머금은 구름이 비를 내려주지 않으니 ‘너’는 계속하여 말라간다. 이 순간 ‘고백이 흐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한 순간을 정지된 시간이 다시 흘러가는 장면으로 표현한 영화가 있다. 흐르는 시간을 타고 ‘홀로 울고 있는’ 너의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하늘이 푸르게 개고 그림자가 지워지며 풍경이 맑아진다.
‘살고 싶어’지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서 살아가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나니 생명이 만개하는 여름이 온다.
이 시는 사랑을 ‘흐른다’는 동사에 빗대어 설명한다. 정지되어 있는 생명이 다시 생장을 시작하는 순간, 즉 고백이 흐르는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나를 살고 싶어지게(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2. 당신과 나는 외계인
당신은 혼자 따듯한 우엉차를 끓여 마시고
가만히 앉아
차가 몸으로 퍼져나가는 경로를 느껴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런 당신이 유일하다곤 생각해본 적 없죠
그러니 당신과 같은 인간이 나타난대도 놀랄 것도 없지만
당신과 나는 놀랄 만큼 똑같습니다
차를 삼키는 시간까지
피가 도는 속도까지
(……)
나를 책임지세요
그런 부탁은 안 하겠습니다 나는 다만 바랄 따름입니다
당신이 나를 인정해주기를
내가 외계인이란 것
지구에 나의 고향이 없다는 것
알 수 있는 사람 당신밖에 없으므로
(……)
둘 다 떠나고 싶기에 둘 다 떠나지 못하겠죠
누군가는 지구에 남아
외계인을 보았다고
그것이 나와 같았다고 증언해야 하기에
우엉차가 담긴 찻잔에 손자국이 남았다가
서서히 사라지네요
차도하, 「처치 곤란한 인간」 부분(『미래의 손』)
타인이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마치 피를 나눈 쌍둥이처럼 같은 생각과 마음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보통 이런 사람을 소울메이트, 내지는 운명이라고 말한다.
‘당신과 나는 놀랄 만큼 똑같’다. ‘우린 아주 닮은 게 아니라 아주 같다.’ 이러한 관계는 쌍둥이를 넘어, 나 자신과도 같은 상태에 가깝다. 초월한 사랑은 당신을 나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본능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인 인간이 본능적으로 이타적이 될 수 있는 순간은 당신을 나의 일부, 혹은 전부로 인식할 때이다.
이것이 단순한 착각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나를 완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나의 존재 그 자체를 알아보고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이 오직 당신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제까지 다른 인간들 틈에서 느꼈던 불일치와 다른 수준의 일체감을 느끼며 나는 인간이 아닌 외계인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외계인이라면 나와 같은 당신도 외계인이다. 이곳에 우리의 고향은 없으므로 떠나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지만 그럴 수 없다.
당신은 인간 세상에 속해있고, 당신과 같은 나 또한 인간 세상에 속해있으므로 초월적인 사랑일지라도 다른 인간들과 비슷한 모양의 사랑을 나누며 살아간다. 이런 방식으로 사랑을 증명해야만 한다.
청혼은 인간 세상에서 가시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증명할 수 있는 단어다.
3. 단 한 사람과 영원을 약속하기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진은영, 「청혼」(『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사랑은 아주 순수한 형태의 감정이다. 오랜 시간 너와 내가 각자 걸어온 인생을 받아들이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일이다. 나는 네가 인류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너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한다.
나를 위한 유일한 존재를 발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삶의 유한함이나 감정과 사람의 불완전함 같은 것들을 몰랐던 어린아이처럼 영원을 맹세해버린다. 그것은 앞으로의 행복뿐 아니라 너와 나의 슬픔까지도 끌어안겠다고 다짐하는 일이다.
사랑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사랑은 복잡한 감정이라서 단순히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내가 아는 시인은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사랑을 할 때, 나는 네가 되고, 너는 꽃잎이 되고, 외계인이 되고, 웅성거리는 별이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