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간을 두려워한다. 정확히는 시간에 따른 변화를 무서워한다.
상한 음식을 먹고 배가 아플까봐, 나이를 먹고 주름이 늘어날까봐 냉장고를 온종일 돌리고 좋은 화장품을 한가득 바른다. 현대의 자본과 기술은 무언가를 보존하고 가두려는 우리의 욕망을 충족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미술관 및 박물관이라는 제도의 존재 이유 중 일부도 그와 동일하다. 가치 있는 작품과 유물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기능은 이 기관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오랜 시간에도 변함없는 아름다움과 의미를 지닌 오브제를 관람할 수 있게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중인 전시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은 이와 같은 세태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작품이 고정불변하지 않고 변화한다면, 나아가 사그라진다면 어떨까. 미술관 스스로의 역할을 뒤엎는 이 자기비판적인 전시는 삭는 미술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를 비추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갖춰야 할 태도를 넌지시 제안한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처럼, 우리에게 흙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죽음을 포용하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흙이기에, 자연의 흙은 청결함을 유지하는 실내 공간에선 배제된다.
아사드 라자는 흙을 미술관 내부로 들여옴으로써 신선한 놀라움을 주었다. 특히, 깨끗하게 멸균된 흙이 아닌, 각종 폐기물이 삭아가며 유기물들이 살아숨쉬는, 작은 생태계를 구축하였다.
〈흡수〉는 관조하는 작품이 아니다. 분해가 이뤄지는 흙의 쿰쿰한 냄새를 맡으며 푹신한 질감을 두 발로 느낄 수 있다. 소멸의 과정을 배제한 현대 도시의 한복판에서 자연의 시간을 경험하게 만든다.
흙 못지 않게 자연을 시간을 보여주는 존재가 있다면 바다일 것이다.
세실리아 비쿠냐는 해변에서 채취한 깃털, 돌, 막대기, 플라스틱, 조개껍질 등을 이용하여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은 조각 〈프레카리오스〉를 만들었다. 작은 기념비 같은 모습이지만 영웅의 숭고함을 기리거나 전쟁의 승리를 기억하진 않는다.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되 파도에 쓸려나가는 데에 즐거움을 얻듯이, 덧없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조각이다.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가고, 바다에 녹아내린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일까. 유코 모리의 〈분해〉는 죽음과 소멸의 의미를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찾아보길 권유한다. 과일이 익고 썩어가는 동안 방출되는 에너지는 노래를 만들고 빛을 밝히며 사물이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이 작품은 일본의 전통 불화인 ‘구상도’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는데, 죽은 사람의 몸이 썩어가는 과정을 그린 그림은 스님들에게 육신의 덧없음과 함께 죽음이 단절이 아닌 양태의 변화임을 일깨워주었을 것이다. 그 가르침은 모리의 미학적 실험을 통해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다.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는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 삭아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숭고한 희생이나 극적인 종말의 미학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존재들까지 모여 함께 만들어가는 연대의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