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회를 보던 날, 급히 연강을 마치고 가느라 밥 먹을 시간이 없어 스타벅스에서 샌드위치와 음료를 샀다. 사이렌 오더의 편리함,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 접근성, 보장된 맛과 학생 할인 혜택까지. 이 기업을 소비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란 어렵다. 하지만 스타벅스의 창업자 하워드 슐츠는 이스라엘로부터 '시온의 친구상'을 받은 대표적인 친이스라엘 인물이다. 나의 편리한 소비 뒤에는 복잡한 전쟁의 그림자가 따라온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 소식으로 유류비가 오르자, 즐겁게 교환학생을 떠나야 하는 나에게 전쟁은 '비행기표를 서둘러 끊어야 하는 이유'가 되고, 주변의 누군가에게는 '주식 판도의 변화'가 된다. 전쟁은 이토록 철저히 각자의 일상적 이해관계로 치환된다.

영화 <힌드의 목소리>는 2024년 1월 29일 가자지구, 폭격 된 차 안에 홀로 갇힌 6살 소녀의 실제 목소리를 담아낸 작품이다. 가족과 피난 중이던 힌드가 국제 구호단체 적신월사에 구조를 요청하며 남긴 '실제 전화 음성'을 중심으로, 아이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버틴 5시간의 고통을 89분의 러닝타임으로 재구성한다. 이 영화는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사상 최장 기립박수를 기록하며 심사위원대상을 받았고,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오르는 등 화려한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질문은 남는다. 영화가 개봉한 뒤 가자 지구에서의 삶은 조금이라도 나아졌는가? 전쟁은 그들을 비판하는 세상의 여론을 의식하긴 하는가? 영화의 성공은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힌드'들에게 어떤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가.

나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6살 아이가 죽은 가족들 사이에서 고립된 채 내뱉는 처절함을, 안락한 좌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관람한다. 이스라엘군은 소녀가 죽었는지 자고 있는지조차 구별 못 할 어린 나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살을 위해 5시간 동안 그 주변을 맴돈다. 나는 손에 힘을 꽉 쥔 채, 아이가 느꼈을 고통의 0.00001%도 되지 않을 비중의 고통을 느낀다. 영화 속 인물들도 나와 같은 지점에서 괴로워한다.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무너지는 자신을 도울 상담사가 항시 대기 중인 복지를 누리고 있는 여유와, 아이가 죽어가는 동안 고통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GTA 게임을 하려는 자신들의 즐거움에 절망한다. 적신월사 대원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아이의 사진과 통화 내역을 편집해 SNS에 알린다. 작은 목소리가 이들의 최선이자 가장 안전한 선택이다. "사람들의 동정을 사는 게 현실적으로 무슨 도움이 되느냐"라며 스스로 화를 내면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힌드의 목소리를 알린다. 마치 이 영화가 세계로 뻗어 나가 우리에게 닿는 과정처럼 말이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바로 출동하지 못하고 이스라엘군에게 조정을 요청해야만 구급차를 보낼 수 있는 대장, 목소리를 들으며 울부짖으면서도 현장에 달려가지는 못하는 상담원들. 이들의 우유부단함과 답답한 행동에 함께 관람한 친구는 처음엔 화가 났다고 했다. 그리고 이 분노는 러닝타임이 흐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는 자기 자신을 향했다가,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이스라엘을 향했다가, 다시 갈 곳을 잃었다. 무력한 피해자들이 절차를 지키며 책잡히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동안, 무기를 든 자들은 거침없이 파괴하며 그들이 지켜야 할 절차를 새로 만들어낸다. 무기를 든 자들도 과거에 학살당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는다. 이 굴레를 멈출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영화 홍보 문구 속 감독들의 말은 인상적이고 희망차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이 영화가 방관자의 역할을 거부하고 국제 정의의 능동적 주체가 되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영화는 폭탄 테러를 막지 못한다. 다만 감독의 말대로 "진실이 지워지는 것"을 막을 뿐이다. 우리의 목소리는 힌드에게 곧 가겠다고 약속하던 적신월사 직원들의 목소리처럼 나약하고 무력해 보인다. 구조대원들의 목숨도 위험하기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우리가 영화관을 뛰쳐나가 당장 영위하고 있는 삶을 버리고 가자지구로 달려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과 절차가 가로막고 있으며 도착하더라도 이미 늦어버렸음을 안다. 긴 고통의 조정 시간을 뚫고 출동한 끝에 산산이 부서져 파편이 된 구조대원들의 잔해와 만신창이가 된 힌드와 가족들의 시신이 끝에 적신월사와 우리를 기다렸던 것처럼.

시사회가 끝난 뒤 우연히 한 정치인과 인터뷰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라는 그의 질문에 카메라를 의식한 나는 "그럼에도 진실을 알고 관심을 가지는 게 의미 있지 않을까요"라는 식상하고 안전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에게 진짜 묻고 싶었던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미국과 이란이 전쟁하는 동안, 이란의 민중들이 죽어가는 동안, 미국의 동맹국인 대한민국이 방관함으로써 그 죽음에 일조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그런 나라의 정치인으로서 당신은 이 영화를 보고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나에게 이 질문을 던지는 당신은 대체 어떤 힘을 행사할 수 있으며, 정말로 행사할 의지가 있기는 한 것인지. 어쩌면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무력감이 이 모든 질문조차 의미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끝내 뱉지 못한 목소리들이 안에서 울렁거렸다. 그를 보낸 뒤 집으로 돌아오며, 이 영화를 보고 고민하는 정치인, 진실을 폭로하는 창작자와 관객들, 그리고 적신월사의 구조대원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다.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삭제되어 버린 세상을.

우리는 모래알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않는다. 돌 하나가 오랜 시간을 거쳐 가루만큼 바스러지는 시간 동안의 맥락에 관심을 두기엔 시간이 너무 없고, 모래알은 너무 작다. 그저 그들이 모여 이룬 '모래사장'이라는 거대한 장소만을 방문하고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모래알들이 모두 사라지면, 모래사장이라는 거대한 형상 또한 함께 소거된다. 존재의 의미는 어쩌면 그 지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작은 목소리, 개별적인 모래알,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작게 공명하는 사람들.
나는 영화를 본 덕분에 힌드가 바다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해변에서 남동생과 놀던 힌드의 모습이 담긴 홈비디오를 보며, 나 역시 바다에서 동생과 모래성을 쌓던 기억을 불러온다. 힌드와 나 사이에는 시간과 장소, 국적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있지만, 그 너머에는 선명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다를 좋아했다는 사실,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거대한 폭력 앞에서 끝내 아무 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 나약함을 공유하고 있다는 감각이야말로, 우리가 진실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단 하나의 이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