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게임’은 생존을 건 게임을 의미한다. 목숨을 담보로 한 이 서사 구조는 인물의 생존 본능을 활용하여 관객에게 강렬한 시각적 쾌락을 선사한다는 특징이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헝거게임’ 시리즈, 그리고 소설 원작 영화 ‘배틀로얄’은 모두 데스게임의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고 있다.
‘죽음’은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장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이다. 살아간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순간과의 단절이기 때문이다. 모순되게도 ‘죽음’의 순간은 여러 매체 속에서 너무나 당연한 자극이자 유희가 되어가고 있다.
데스게임 서사 속 인물들은 죽음 앞에서 처절한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살기 위해 비굴해지거나 가장 가까운 사람을 배신하는 치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혹은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생전 전하지 못했던 진심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런 장면을 감상하며 우리는 현실의 죽음 앞에서 느꼈던 슬픔을 똑같이 느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소재로 꾸려진 이야기를 바라보며, 인간은 더 이상 현실 속 죽음을 향한 감정만을 느끼지 않는다.
배틀로얄: 죽음을 소재로 한 오락

데스게임 서사 유행의 시초이자 상징인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영화 ‘배틀로얄'(2000)은 ‘신세기교육개혁법(BR 법)’을 배경으로 한다. 극심한 사회 혼란에 대응해 매년 전국의 중학교 3학년 중 한 학급을 뽑아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게 한다는 극단적인 설정이다.
이 영화에서 법의 정당성이나 사회적 반발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배틀로얄’ 그 자체만이 중요하다. 선발된 3학년 B반 42명의 학생은 무인도로 이송되어 무작위로 무기를 배정받는다. 어떤 학생은 산탄총, 낫, 접칼과 같은 무기를 배정받지만, 누구는 쥘부채(하리센)나 냄비 뚜껑을 받는다. 생사가 오가는 게임에 이러한 도구를 투입했다는 사실은 실소를 유발하는 것을 넘어 황당함마저 느끼게 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무게를 단숨에 끌어내린다.
영화는 소모되는 조연들의 죽음 하나하나에 굳이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그들의 사연은 애틋함을 자아내기보다 ‘어떻게 죽는가?’라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데 그친다. 수학 공식을 중얼거리며 덤벼들다 죽거나, 도끼를 휘두르며 위협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그 도끼에 맞아 죽는 모습 등은 캐릭터의 서사가 오직 자극적인 퇴장을 위한 소모품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죽기 직전의 고백조차 아련하기보다 급박하고 우스꽝스럽다. 죽음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말과 행동은 비극적인 정서 대신 기이한 조악함을 남긴다.
클리셰(Cliché)로 전락한 최후
이 영화는 캐릭터의 최후와 클래식의 조합을 특징으로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다. 누군가가 산탄총을 맞으며 쓰러질 때, 클래식 곡이 울려 퍼지며 그 장면은 더 이상 슬프지 않은, 오히려 유쾌하고 기이한 장면이 되어버린다.
누군가의 죽음을 웃으며 관람하는 것은 분명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데스게임 서사가 넘쳐나는 매체의 홍수 속에서, 살육전은 누군가에게 도파민이 되었고 특별할 것 없는 클리셰(Cliché)가 되었다. 죽음이 더 이상 죽음으로 다가오지 않는 시대인 것이다.
살육이 반복되는 스크린 속 죽음은 점차 그 의미를 잃어간다. 죽음이 진부한 장면으로 전락할수록, 우리는 역설적으로 삶 속의 '진짜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사실 '진짜 죽음'이라는 말조차 어색하다. 죽음에 가짜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스크린 속 죽음은 허구일지라도, 그것은 결국 현실을 본뜬 결과물이다. 누군가의 생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은 어디에서나 공평하며, 그 무게 또한 결코 다를 수 없다.
우리가 잊어버린 죽음의 무게
우리가 누군가의 종말을 바라보며 장례식장에서의 슬픔이 아닌 쾌감, 냉소, 비웃음 등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독특하고도 소름 끼치는 경험이다. 성인이 채 되지 않은 학생들이 요란하게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현실의 죽음과 매체 속 죽음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스스로에게 괴리를 느꼈다.
데스게임 서사 구조를 따르는 작품을 감상할 때,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 ‘도파민’을 얻는다. 소재 자체의 선정성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인물이 위기 앞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며 쾌감을 얻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할 것처럼 구는 인물의 모습을 보면, 애잔하기도 하고 가끔은 우습기도 하다. 타인의 처절함을 관람하며 도파민을 채우는 우리의 시선이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허구 속 죽음은 현실의 죽음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현실의 개념에서 온 것이다. 죽음은 절대 가볍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들의 죽음을 관람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