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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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극장은 축축하고 불온한 운명에서 출발해 외톨이나 도피자들을 기어코 교육하는 장소로 품을 키워왔다. 어쩌면 나 역시 그 속에서 매번 다른 존재로 태어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극장에 있는 동안만큼은 나를 비우고 타인을 연민하는 일에 가뿐한 부력이 주어졌고, 숏과 숏 사이의 압력으로 멀리 떠밀려가는 동안엔 종전까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인생의 시간이 고개를 내밀고 손짓하곤 했으므로. (서문에서)
 

 

어린 시절, 안방에 TV가 들어오고 음악 프로그램과 예능이 하루의 흥겨움을 채우던 때가 있었다. 그 떠들썩한 소음 사이로 명절 특선 영화는 내게 전혀 다른 종류의 몰입을 선사했다. 처음 보는 세계가 화면 속에 펼쳐졌고,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임에도 이상하게 나를 붙들었다. 그 낯선 세계 안에도 내 삶과 맞닿는 작은 연결고리가 조용히 숨어 있었고, 그건 어른이 되어서도 선연하게 느껴질 만큼의 강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계단 밑 좁은 방에서 호그와트로 건너가는 해리를 보며, 평범한 한국의 방구석 어린이였던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비슷한 일상에 무한한 상상이 덧입혀져 매체를 타고 건너올 때, '예술'이라는 이름을 얻는다는 것을.


나는 좋아하는 작가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을 즐긴다.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이들이 평범한 하루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자주 궁금했다. 우연히 마주친 도서관 책장에서 시작된 호기심은 어느덧 작가의 세계를 향한 은은한 선망으로 이어진다. 그의 문장 속에서 나와 닮은 시선이나 감정을 발견할 때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깊은 호감이 마음 한구석에 뭉근히 자리 잡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삶을 살면서도 같은 대목에서 마음이 움직였다는 사실은 때때로 의외의 소속감을 선물했다. SNS 속에서 다채롭고 특별해 보이던 타인의 삶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나와 닮은 평범한 하루 위에 놓여 있었다. 그 닮은꼴의 일상을 마주할 때면 낯설었던 타인의 삶이 내 곁으로 가깝게 다가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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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익숙해진 이름들이 있다. 김소미 평론가도 그중 한 명이었다. 사람이 먼저 닿기보다는 문장이 먼저 닿고, 그 문장들이 닿는 감각이 겹쳐 어느새 기억 속에 자리 잡는 사람. 서점의 빽빽한 책장 앞에서 무심한 눈으로 제목들을 훑다가도, 낯선 이름들 사이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면 괜히 반가움이 앞선다. 마치 인파가 가득한 번화가에서 우연히 아는 이의 뒷모습을 발견한 것처럼 그 이름은 유독 선명하게 읽히곤 했다.

 

나이가 들수록 직접 마주하는 사람은 줄어들지만, 연결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가상 세계에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고, 그 이야기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펼쳐진다. 이제는 현실에서 옷깃을 스치는 일보다, 화면 너머 누군가의 문장 앞에 멈춰 서는 일이 더 선명한 인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수많은 게시물 사이에서 유독 어떤 사람을 궁금해하게 되는 것. 자기소개조차 없는 누군가의 일상, 그 틈새의 기록에 이끌리는 것. 알아가기보다 '좋아하기'를 먼저 시작하게 되는 것.

 

그 멈춤의 시간들이 이어져 인연이 되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된다.

 

*


이 책도 그런 인연 끝에 집어 들었다. 평론가란 내가 보지 못한 작품의 구석을 보고, 무심히 지나친 장면들 사이의 미세한 결을 붙잡아내는 예리한 분석가라 생각했다. 나는 늘 마지막 장면이나 오래 남는 대사, 감정을 움직인 몇 개의 컷 정도만을 느슨히 붙잡고 극장을 나오는 관객이었기에 늘 세밀하고 화려한 그들의 비법 노트가 궁금했다. 나는 그저 내 일상의 경험을 건드리는 어떤 장면의 존재, 그 '일렁임의 횟수'로 인생 영화인지를 가늠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책 속의 기록은 생각보다 자주 내 일상과 겹쳐 보였다. 문장은 평론보다 담백하고 소소하고 솔직했다. 잘 다듬어진 문장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은 예상보다 훨씬 자주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의외로 뭉툭한 다정함과 함께 있었다. 영화를 좋아해서 쓰기 시작한 한 사람의 내밀한 불안과, 그것을 업으로 삼은 이후 감당해야 했던 책임이 문장마다 묻어 있었다.

 

 
어떤 일을 좋아하면서 실제로 행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 일에 따르는 제도적 명칭에 늘 괴리감을 느끼는 상태는 도대체 무엇일까. 내 안에 사는 '사감 선생님'은 용기를 주기보다 수치심을 잊지 말라고 눈을 번뜩이는 존재였다. / p.52

이렇게 나온 글들은 마음의 표면장력을 뚫고 흘러나온 진액 같아서 내 계획에 없었던 어조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이상한 무늬와 그을음을 담고 있기도 하다. / p.161
 

 

내가 좋아했던 것은 ‘오역’의 자유였다. 예술을 마음껏 오역하며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반죽하고, 내 삶 쪽으로 가까이 끌어오는 일이 감상의 기쁨이라 믿어왔다. 그런데 그것을 직업으로 삼은 이에게 오해는 즐거움인 동시에 무게였다.

 

작품의 주인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대조하고,

그 오해를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매력적인 언어로 정돈하는 일.

 

그녀는 잘 다듬는 사람이기 이전에, ‘오래’ 다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문장들은 선명했다. 날카로워야만 하는 직업인의 문장과 한 개인의 삶에서 길어 올린 문장이 부딪히는 순간에도, 그것들은 어느 한쪽으로 성급히 기울지 않았다. 다리를 놓는 사람의 손목에 늘 미세한 떨림이 존재했다는 것, 그 진동이 내게 점차 선명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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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그녀의 두려움과 후회, 불안과 자기검열을 함께 통과했다. 그것들은 내 삶에도 이미 익숙한 자국들이었다. 저자가 말한 문학의 의미를 읽는 내내 실감할 수 있었다.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발생하는 끈끈한 교류에 관해서라면 그 깊이와 내밀함으로서는 문학이, 찰나의 희열로서는 음악이 훨씬 탁월할 수도 있다."

 

가장 정직한 감각의 공유. 글은 결과물에 도달하기까지의 망설임과 흔들림을 숨기지 않는다. 이전의 나는 그녀가 머무는 칸 영화제와 내 방 사이의 거리를 먼저 생각했지만, 그녀의 문장은 그 물리적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일에 몰두하느라 놓쳐버린 일상의 삐걱거림이나 살아남은 자로서 느끼는 부채감은, 내가 사는 곳과 내가 쓰는 문장 속에 존재하던 것들과 닮아 있었다.


 
그토록 어리석었던 우리의 청춘, 무수한 실수들도 웃으며 떠올려주세요. 모두가 엄연히 살아 있어서 그래요. / 진은영, 『실수』

갑판 위에 선 시인은, 미약한 데다 실수까지 저지른 어느 기록자에게까지 너그럽게 손 흔든다. 여전히 도처에 있는 물 새는 구멍으로 달려와 같이 소리치는 사람(혹은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자는 손짓 같기도 하다. 살아 있는 나는 당신들의 너그러움 앞에서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 p.156
 

 

내향적인 성격에, SNS에도 능숙하지 않은 나는 연결의 감각에 자주 무뎌지곤 한다. 그러나 나와 닮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혼자인 시간에도 내가 세상과 아주 깊이 맞물려 있음을 깨닫는다. 나의 일상이 재생될 때 함께 돌아가는 수십만 개의 톱니바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 쪽의 바퀴가 마모되어 잠시 힘을 잃을 때도, 어딘가에서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생(生)들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

 

나를 밀어낼 힘조차 남지 않았을 때,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문장에서 동력을 얻는다. 그리고 나 자신을 조금 덜 가혹하게 대할 용기를 얻는다. 자신의 넘쳐흐르는 기대에 미치지 못해 지우기만 반복하던 답답한 시간도, 내가 뱉은 말이 누군가를 다치게 했을까 봐 불안해하던 밤도, 어딘가에서 누군가 비슷하게 겪어내고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조금 느슨해진다.

 

이 책은 그렇게 나에게 모질었던 시간을 품어주었다.

 

그저께 충동적으로 들어간 영화관에서 잠들어버린 나 자신을 오랫동안 질책해 온 마음까지도.

 

 
영화는 자신을 배신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하급’ 관객에게도 남아 있는 장면의 인식과 감각을 내어주는 유기체다. 영화라는 종은 보는 이의 망막 속에 침투해 스스로 공백을 메우고 잘린 곳끼리 접붙어 재생한다. 깨어 있음과 잠듦 사이를 오가며 완성된 영화는 불완전한 형태이기에 더 선명한 기억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 p.79
 

 

이 문장을 읽고 나서야 나는 그날의 공백을 사랑하게 되었다. 완전하지 않아서 더 오래 기억되는 영화의 조각들. 나는 이제 놓쳐버린 장면을 탓하기보다, 내 망막에 남은 선명한 조각들에 집중한다. 이 책이 내게 온 시기가 유난히 정확하게 느껴진 이유도 바로 이 '용서'의 순간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책은 내게 필요한 순간에 도착한 가장 정확한 응답이었다. 문장이 먼저 닿아 시작된 인연은, 끝내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내 삶에 스며든 작품은 이제 화려한 수식 없이도 오래도록 곁에 머물 것이다. 자신의 모서리를 기꺼이 드러낸 채, 시시각각 풍화되는 일을 견디며 타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을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그 기록들 덕분에 오늘도 겨우 한 문장을 다시 쓰는 사람들에게.

 

나의 간직함이 작은 보답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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