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비밀통로는 일본 연극계의 거장 마에카와 토모히로의 원작 ‘허점의 회의실’을 바탕으로, 민새롬 연출이 새롭게 재해석했다. 원작의 철학적인 질문은 유지하되, 인연과 생사에 관한 결은 한국 관객의 정서에 맞도록 더욱 확장해 공감대를 이끌었다.
작품은 이유도 모른 채 낯선 방에서 마주하게 된 두 남자의 상황으로 시작된다. 경계하며 질문을 쏟아내는 '서진'과 익숙한 시간동안 누군가를 기다리던 '동재', 두 사람은 동시에 한 권의 책에 손을 얹게 되고, 그 순간 과거의 장면들이 펼쳐진다. 책 속에는 두 사람이 여러 생에 걸쳐 맺어온 관계의 기록이 담겨 있다. 전생의 기억을 따라가던 그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이곳이 ‘생과 사 사이에 존재하는 통로’임을 깨닫는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어왔던 두 사람. 그러나 이 통로에서 반복되어 온 삶의 조각들을 확인하며, 그들은 서로가 수많은 시간 속에서 인연으로 이어져 왔음을 알게 된다. 과거의 선택과 감정, 미처 마무리되지 못한 관계들이 겹겹이 드러나고, 두 인물은 차분히 시간을 되짚는다. 그리고 결국 하나의 질문에 도달한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 완전히 죽을 수 있는 걸까?”
이 질문은 단순히 생물학적 죽음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기억과 관계, 그리고 존재의 의미에 대한 사유로 확장된다.
작품은 생과 사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기보다, 그 사이의 틈에 머무는 감정과 인연을 조명한다. 이미 새로운 삶을 앞둔 상황임에도 두 인물은 이전의 삶에 불현듯 몰입하고 이미 지난 일이라며 멀어진다. 연극 속 설정은 다소 초현실적이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관계에 대한 의미와는 결코 동떨어지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익숙한 시간을 보내온 듯한 남자 ‘동재’ 역에는 양경원, 김선호, 김성규가 캐스팅됐다. 낯선 공간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서진’ 역은 이시형, 오경주, 강승호가 맡아 각기 다른 결의 매력을 선보인다. 6명의 배우들은 1인 다역을 오가며 밀도 높은 연기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특히 공개된 캐릭터 포스터는 두 인물을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와 배우들의 정제된 눈빛만으로도 극의 분위기를 함축적으로 담아내 눈길을 끈다. 반복된 삶과 죽음을 경험해 온 ‘동재’와 ‘서진’의 시간, 그리고 그들이 관객들에게 제시할 질문은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정서를 예고한다.
‘기억의 책’을 매개로 펼쳐지는 서사는 관객을 비밀스러운 기억의 공간으로 이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진지한 이야기 속에서도 불쑥 튀어나오는 위트 있는 대사들은 극에 생동감을 더하고, 배우들의 변화무쌍한 열연이 긴장과 이완을 능숙하게 오간다.
연극 <비밀통로>의 시공을 넘나드는 기묘하고도 다정한 여정은 관계에 지치고 여유를 잃은 현대인들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넨다. 인연의 소중함을 되짚어보게 하는 이야기와 배우들의 에너지가 어우러지며, 극은 따뜻한 울림을 가진 채 막을 내린다. 빠른 속도와 자극에 익숙해진 시대에, 이번 작품은 잠시 멈춰 서서 자신과 타인, 그리고 가장 가까운 이들의 관계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연극 ‘비밀통로’는 NOL 씨어터 대학로 우리투자증권홀에서 성황리에 공연 중이며, NOL티켓과 티켓링크를 통해 예매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