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한은 자신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어릴 적 아버지가 제대로 된 뜻도 알지 못한 채 교회에서 받아온 이름인 ‘요한’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적어도 고요한의 생각은 그렇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말한다. 새총을 맞고 영원히 날지 못하게 된 이름 모를 새, 친구들에 의해 찢긴 짝퉁 후레쉬맨 인형, 자신을 낳다가 사라진 엄마, 자신이 태어나기 직전 저수지에 빠져 죽은 형, 심지어 부인이 될 뻔했던 사람도 딸인 '미리'를 낳은 후에 세상을 떠났다고. 그 존재들이 전부 요한이 아끼던 존재였다는 사실은 지독한 불행이다.
고요한은 우연히 아버지 가게에서 손님으로부터 한 검은 봉다리를 받게 된다. 그는 그 봉다리 안에는 피 묻은 칼을 발견한다. 아버지는 재수가 없다며 길가에 버리라고 하지만 고요한은 기어코 손으로 그 칼을 손으로 잡는다. 그건 아마 본격적인 불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겠지. 며칠 뒤 마을에서 한 아저씨가 죽은 채로 발견됐고 경찰은 고요한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 칼에 남아있는 지문이라고는 고요한의 지문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네가 그 사람 죽였지. 사실 경찰의 말은 질문보다는 확인 내지는 협박에 더 가까웠다. 어느 순간 고요한은 두려웠을 것이다. 이 형사들이 나 말고 우리 가족들까지 때리면 어떡하지, 와 같은 불안. 그 불안 속에서 고요한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고요한은 이름 모를 사람이 지은 죄의 무게를 떠안은 채 감옥에 갇혔다. 연극은 자신이 얼마만큼 불행한지를 길게 늘어놓는 고요한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가 살아온 지난 삶은 꽤 긴 호흡의 오프닝 독백으로 압축된다. 한 걸음만 내딛어도 벽에 가로막힐 정도로 좁다란 감옥 안에서 이어지는 고요한의 독백은 어딘가 애처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선 시종일관 희극적인 톤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고요한의 오프닝 독백에서 흘러나오는 리드미컬한 음악은 마치 그의 말이 추진력을 잃지 않게끔 길을 안내해 주는 인도자의 수행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고요한의 상처에서 느닷없이 풀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딱지가 앉아야 할 자리에 딱지 대신 풀이 돋아났다. 당연하게도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다. 이상한 건 이뿐만이 아니다. 고요한이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떠나보낸 ‘죽은 존재들’이 귀신이 되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죽은 형을 시작으로, 후레쉬맨, 검은턱할미새, 자신을 감옥을 내몬 칼까지. 분명 형체가 없어야 마땅하지만 어째서인지 부피를 차지하는 귀신들 때문에 안 그래도 좁은 고요한의 독방은 이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다.
기적처럼 가석방으로 풀려난 고요한은 가장 먼저 딸 ‘미리’를 찾기로 결심한다. 과거 자신의 저주가 가닿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아원에 보낸 미리를 이제는 다시 찾아보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미리의 병원이자 고아원 동기인 새봄을 만나게 된다. 초면부터 자신을 납치해 달라는, 다소 황당한 요청에 처음에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요한은 이내 그런 새봄과 미리를 찾는 여정에 동행하기로 한다. 어쩌면 새봄을 통해서 그동안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진짜 미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요한을 제외한 모두가 아는 사실이 있다. 바로 미리가 이미 요한의 일행과 줄곧 함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리는 귀신이 되어 새봄과 함께 요한을 뒤쫓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결말을 제외한)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미리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은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미리 사망 원인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강한 안도감이 들었다. 미리의 형체를 의도적으로 감춤으로써 관객은 철저히 요한의 입장에서 극을 따라간다. 극의 후반부, 어째서 자신만 미리가 보이지 않는 거냐는 요한의 울음 섞인 절규에 관객이 함께 동요할 수 있는 까닭이다. 서로가 서로를 미행하고 있는 아이러니 속에서 관객은 조심스레 독특한 그들의 여행을 따라간다.
이름 몰랐던 새의 진짜 이름은 검은턱할미새다. 후레쉬맨은 요한에게 ‘디디’라는 새 이름을 부여받은 후 ‘짝퉁 후레쉬맨’이 아닌, ‘디디’로서 살아간다. 요한은 아버지가 뜻도 모른 채 가져 온 자신의 이름을 평생 멀리하며 살아왔으나 끝에 다다랐을 때 그는 고요한으로 살라는 미리의 말을 가득 끌어안은 채 다시 호흡할 힘을 얻는다. 이제는 더 이상 말을 더듬지도, ‘몸의 마음은 말 말의 마음은 몸 마음의 몸은 말’과 같은 주문을 외지 않아도 괜찮다.
억울한 누명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15년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한 주인공에게도 여느 사람들 생각하는 것만큼의 극적인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상대방 앞에서 말을 더듬지 않기, 자신만의 주문을 외지 않아도 편히 호흡이 가능한 것,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지 않기. 남들이 봤을 때 별거 아니라고 느낄 법한, 작고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변화 정도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아마 요한에게는 자신의 세상이 180도 뒤집히는 것과 같은 엄청난 변화일 테니.
극의 결말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미리와 새봄과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요한이 함께 추는 춤은 곧 ‘해방’을 뜻한다. 지금까지 자신을 놓지도, 그렇다고 끌어안지도 못한 두 존재가 서로를 마주한 채 추는 춤은 기꺼이 나를 배반하지 않고, 세상을 등지지 않겠다는 유쾌한 선언과도 같다. 마지막 장면(그들의 언어로는 극의 클라이막스이자 하이라이트)이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낸 새봄은 관객들로 하여금 짙은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미리가 사라지고 생겨난 요한의 빈자리에는 새봄이 자리한다. 마치 요한의 삶에 새로운 봄이 피어난 것처럼. (이는 새로운 봄을 맞이한다는 새봄의 이름 뜻과 이어진다) 새봄은 단순히 미리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들어가는 대체제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요한은 미리가 지워진 내면의 부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새봄 또한 온전한 하나의 객체로서 환하게 맞이한다. 이러한 과정은 ‘고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 위한 그의 선택과도 맞닿아 있다. 절대 채워지거나 메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고요한의 죄책감에는 어느새 만개한 초록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 초록은 유난히 풀을 좋아하던 미리일 수도, 죽음과 대비되는 생명력의 색일 수도 있다.
자칫하면 신파로 내몰릴 수 있는 몇몇 구간도 창작자들이 섬세하게 신경 쓴 덕분에 신파와 적절한 감동 사이 일정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거워질 수도 있는 소재를 적절한 코미디로 풀어내면서도 그 아픔을 마냥 가볍게 풀어내지는 않은 수작이다.
“나 행복할게, 죽어라 노력해서 행복할 거야. 가끔 불행해도 맥없이 너를 따라가지 않을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