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당 리뷰는
뮤지컬 '팬레터'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선생이시여, 슬픔을 안고 계시나이까?”
봄바람을 타고 날아든 편지는 연서가 아닌, 「팬레터」였다. 한국 뮤지컬의 자부심 ‘팬레터’가 10주년을 맞아 다시 관객들을 찾았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김유정과 이상 등 당대 문인들의 모임 ‘구인회’의 일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된 창작 뮤지컬이다. 이번 시즌은 아시아 전역을 휩쓸고 웨스트엔드 쇼케이스까지 성공리에 마친 ‘월드 클래스’의 위상을 갖춘 채,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그 다섯 번째 막을 올린다.
‘팬레터’는 이미 여러 국가에서 공연되며 서사, 넘버 연출 등 다방면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작가와 팬, 스승과 제자, 혹은 연인과 연인이라는 이분법적 틀로 딱 잘라 나눌 수 없는 복잡미묘한 관계성은 작품의 큰 매력이다.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감성을 극대화하며, 약 160분의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황홀경에 빠져든다. 그것이 눈 부신 빛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서늘한 악몽에서 비롯된 것인지 가늠하기도 전에 말이다.
빛과 악몽의 경계를 넘나드는, 히카루(光)의 탄생
문학도 세훈의 필명, 히카루(光). 이름 하나가 더 생겼을 뿐인데, 그 이름을 빌려 쓴 글은 유독 사랑받는다. ‘한 번도 사랑받은 적 없는 세훈’에게는 낯설고 달콤한 경험이다. 존경하는 작가 해진에게 보내는 편지가 막힐 때도 히카루의 다정한 훈수가 문장은 유려하게 만든다.
선생이시여, 슬픔을 안고 계시나이까?
그렇다면 그 슬픔을 나누어 주소서.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길을
지시하여 주소서
이러한 진심은 자신의 슬픔을 알아줄 단 한 사람을 그리던 해진의 심장에 깊이 박힌다. 편지 한 통에 불과했지만, 해진이 히카루를 사랑하게 되기에는 충분했다. 세훈은 히카루가 자신임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깊은 사랑에 빠진 해진의 확신 앞에 주저한다. 심지어 각혈하며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해진에게 히카루가 유일한 생의 의지가 되는 것을 보며, 결국 진실을 덮고 기꺼이 자신의 펜을 히카루에게 넘겨준다.
걱정 마. 넌 혼자가 아니야.
같은 몸에 사는
나는 너의 거울.
네가 문자로 나를 빚어냈듯이
내게 말해 봐.
글자 그대로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거야.
세훈의 또 다른 자아로 묘사되는 히카루는 프랑스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주장한 비체(Abject)로 셜명될 수 있다. 비체, 즉 아브젝트란 주체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존재로, 흔히 불결하거나 혐오스러운 것으로 인식된다. 주체는 자신과 아브젝트의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근원적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처럼 아브젝트를 필사적으로 밀어내는 행위가 아브젝시옹(Abjection)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혐오의 대상인 아브젝트는 가장 깊은 욕망이 투사된 파편이기에, 주체는 그것을 거부하는 동시에 강렬하게 매혹된다. 세훈에게 히카루가 바로 그런 존재다. 히카루의 글이 평소 세훈의 문제와 달리 대범하고 도전적인 이유는 그가 그것을 갈망하면서 동시에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카루는 세훈의 반전된 모습이자, 욕망의 분출구인 셈이다.
거울 속의 반전된 이미지
나는 너의 다른 이름
나를 악수하고 진찰할 수 없어도
섭섭해하지 마.
내가 다른 세계를 열어줄게.
해진이라는 외부적 개입으로 인해 세훈과 히카루 사이의 간극이 벌어질수록, 히카루는 점차 독립된 실체가 되어 세훈의 주체성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극의 초반 소년의 복장을 한 채 천진난만했던 히카루는 서사가 진행될수록 해진이 상상하는 ‘순결한 소녀’를 거쳐, 마침내 해진을 파멸로 이끄는 ‘욕망의 여성’으로 진화한다.
넌(난) 거짓이 아니야
넌(난) 거짓말 아니야
나는 그를 얻고
나도 그를 얻고
눈을 가리면, 똑같아.
그렇게 세훈은 글을 얻고, 히카루는 그를 얻었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히카루(光)라는 빛은 도리어 세훈의 어두운 내면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 대가로 세훈은 문학적 성취를 얻었으나, 내면의 질서는 무너졌다. 누가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돈 속에 해진은 점차 죽어간다.
결코 일곱이 된 적 없는
세훈은 해진이 남긴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 그간 숨겨왔던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거짓으로 쌓아 올린 경계가 무너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기꺼이 수치심을 감내한다. 그러나 ‘칠인회’는 세훈을 배척하는 대신 포용하길 택한다. 칠(七)인회라 불리지만 정작 단 한 번도 일곱이 모인 적 없는 이 모임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과 부족함이 문학의 토양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문학이란 티 없이 완벽한 각본이 아니라, 그 행간에 사람 냄새가 묻어나야 비로소 미덕인 탓이다.
편지의 주인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한결같이 너의 답장을 기다리마.
삼월 십칠일 해진으로부터.
해진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세훈을 원망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원망하기도 했으나, 마침내 그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해진은 답장을 기다리던 시간 속에서 이미 히카루의 실체가 허상임을, 혹은 그 허상 너머에 떨고 있는 소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히카루를 좇았다.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악몽일지라도, 그 안에서 피어난 문장들은 한 점 부끄럼 없는 진심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었다
편지 하나에 피어난 사랑과 열망, 그리고 영감이라는 유혹을 해진은 끝내 뿌리치지 않았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그에게 폐병은 그저 동무의 등을 두드리고, 어깨를 빌려줄 하나의 이유에 지나지 않았다.
이른 봄에 찾아온 사랑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바람에 이끌려 자리를 잡았지만, 뿌리를 잘못 내린 꽃처럼 위태로웠다. 그럼에도 유난히 짧았지만, 봄이어서 마냥 좋았던 찰나의 기억이 우리를 살게 한다.
시대를 따라 예술도 제 자리를 찾아간다. 암울한 시대 속에서 봄을 만나지 못한 작품들도 많다. 하지만 비극으로 끝난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몸부림이 찬란했음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