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어도 '돈 파블로 맹인학교' 안에서는 그렇다. 이곳의 학생들은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자신들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존재이며, 바깥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그렇게 그들은 장애를 잊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간다.
틱, 탁.
그런데 아무도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는 이곳에, 어디선가 낯선 지팡이 소리가 들려온다. 전학생 이그나시오가 다가오는 소리였다.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학생들은 그를 불러 세운다. 그러자 그곳의 모두가 자신과 같다는 것을 모른 채, 시비가 붙었다고 오해한 이그나시오는 당황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불쌍한 장님이에요."
이곳에서 금지된 단어를 말해버린 그에게 일동 당황한다. 이에 학생들의 리더인 까를로스는 이그나시오에게 그들 모두 앞을 볼 수 없다는 걸 알려준다. 그리고 자신들이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러자 이그나시오는 더욱 강하게 선언한다. 우린 장님이라고. 아무리 노력해 봐도 우린 다른 사람들처럼 될 수 없다고. 너희들의 그 즐거움은 현실을 회피하는 위선이자 거짓이라고.
처음에 학생들은 그런 이그나시오를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아이로 생각하며 피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씩 그의 말에 동요하기 시작하고, 그의 편에 서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간다. 그리고 그들은 '앞을 보는 것'을 열망하게 된다. 까를로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그나시오가 오기 전으로 상황을 되돌리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찾지 않고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여자친구 후아나마저 이그나시오에게 흔들리고 만다.
틱, 탁. 틱, 탁.
완벽하고 안전하던 세상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 균열 끝에, 어둠이 타오르고 남은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함에 앞서 한 가지 전제하고 싶은 것이 있다. 장애는 개인의 결점이나 무조건적인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여러 가지 특성 중 하나이다. 다만 이 작품은 장애가 개인의 약점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작품은 장애 그 자체에 대해 논하기보다 개인이 가진 한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이 글 역시 그러한 관점으로 작품을 바라보고자 한다.
처음에 이 학교 내에 퍼져 있는 낙관적인 사상은 매우 바람직해 보인다. 자신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 것 자체는 굉장히 건강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에는 한계가 있다. 학교 밖의 사회는 돈 파블로 맹인학교와 다르다. 사회에서는 장애가 약점으로 여겨진다. 때로는 그것이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학생들은 학교에 평생 머무를 수 없으며, 결국 졸업을 하고 떠나야 하며 언젠가는 그러한 세상을 마주해야 한다. 자유로운 즐거움은 잠시일 뿐,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사회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극이 진행되며 관객은 처음에는 문제아로 보이던 이그나시오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가 원하는 것은 현실을 잊으며 거짓된 즐거움을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고통과 슬픔을 공감하고 나눌 친구가 생기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러한 친구들을 얻게 되자 그는 학교에 계속 머물고 싶어하고 진정으로 행복해한다.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개인이 자신의 한계를 외면하고 얻는 행복과, 직면하고 얻는 불행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결말에서 극단적인 낙관론이 불러온 폐해를 보여주며 후자를 선택해야 함을 암시한다.
그리고 자신이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과 다를 게 없다고 여기는 게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무언가 어려울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 그러한 모습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 자기 자신을 무조건적인 낙관 속에 속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또한 같은 어려움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서로 힘을 실어주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이그나시오와 그의 편에 선 학생들은 '앞을 보는 것'을 강하게 원한다. 밤하늘에 반짝거리는 별들의 빛을 보기를 원한다. 이는 선천적 전맹인 그들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이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그나시오와 미겔린은 노래한다. 이 끔찍한 불꽃이 자신을 불태워도, 삶 전체가 이 소망 하나로 끝난다고 해도 앞을 보길 원한다고.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헛된 희망을 동력 삼아 살아가는 것. 동시에 같은 희망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연대하는 것, 초점 잃은 눈일지라도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두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연대의 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어떤 외로움과 고통을 가진 개인을 혼자 두지 않을 것이다.
이그나시오의 지팡이 소리는 처음에는 낯설고 불필요한 소리로 여겨진다. 학생들은 이그나시오에게 이곳에서는 지팡이가 필요 없다고 얘기하지만, 이그나시오는 절대로 지팡이를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둔한 자신이 어디든지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며, 자신의 '믿음'이라고 표현한다.
작품에서 지팡이는 자신이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자각의 상징이다. 이그나시오의 편에 선 학생들은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귀를 기울여야만 들리던 지팡이 소리가 이후에는 학교 전체에 울려 퍼진다. 그 소리들은 이후 여전히 낙관주의에 빠져 있는 까를로스와 도냐 페피타에게 보내는 신경질적인 저항의 표현으로 변하기도 한다.
미겔린은 이그나시오의 편에 섰던 최초의 학생이었다. 그는 이그나시오와 함께하고 나서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는다. 그러나 극 후반에는 이그나시오가 세상을 떠나고, 학생들은 그가 죽은 이유에 대해 추측하는데, 미겔린은 그가 평소 삶을 비관하고는 했으니 차라리 잘 된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선글라스를 다시 끼고 무대에서 퇴장한다. 즉 선글라스는 지팡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신들의 앞에 처해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 아니 보지 않는 것을 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학생들은 이그나시오를 동정하며 자리를 뜬다. 동정이란 자신과 다른 처지에 속한 사람이 대상이다. 즉 이그나시오의 편에 섰던 학생들은 그가 죽자 돌아서버린다.
결국 어둠이 타오르고 남은 자리는 초라할 정도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보인다. 모든 게 원상태로 다시 돌아온 듯 보인다. 그러나 이그나시오가 떠난 뒤 까를로스는 비로소 그와 같이 앞을 보는 것을 바라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써 그 희망을 성취한다. 그 후의 상황은 극에서 나오지 않지만, 나는 이렇게 예상한다. 도냐 페피타는 까를로스가 이그나시오를 죽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결국 그 진실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은 학생들의 리더의 죽음으로 그들의 낙관론이 자멸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타오르던 어둠은 꺼진 듯 보였으나, 그 열기는 도냐 페피타에게, 후아나에게, 그리고 다른 학생들에게 닿았으므로 나는 그 뜨거운 불씨가 아직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또한 이그나시오의 '틱, 탁' 소리가 다른 학생들로부터 다시 들려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