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영화를 물으면 머리가 새하얘지는 경험을 몇 번 한 적 있다. ‘뭐였더라...’ ‘뭐더라..' 분명 좋아하는 영화가 있었는데, 꼭 막상 질문을 받으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면서 시간을 지체하면 상대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런 경험이 꽤나 답답하게 느껴졌던 탓에 메모장에 좋아하는 영화를 적어 다니기도 했다. 누군가 물어보면 바로 꺼내 기억할 수 있게. 오늘의 글은 그런 메모장의 역할을 톡톡히 할 것만 같다.
나 ‘엽기적인 그녀’ 좋아한다! 아주 많이.
20년 전 서울에 매료되는 영화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묻는다면, 일단 필카 감성을 좋아하는 1인으로서 엽기적인 그녀를 볼 때면 영화의 매 프레임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옛 서울랜드, 지하철 2호선 역사 같이 누구나 아는 장소는 물론 그때의 길거리, 간판, 술집, 사람들과 옷차림까지 영화 너머 숨 쉬는 것 같아 보는 재미가 있다.



묘하게 촌스러운 듯 한 디저트 프랜차이즈 가게의 20년 전 모습. 스크린 도어 없던 지하철역, 곳곳에 바랜 페인트칠이 눈에 띄는 놀이공원. ‘오버핏’ 따위는 없이 생각보다 더 다채로운 색감의 옷을 입고 다녔던 그때의 사람들까지. 요즘의 영화에 비해 다른 의미로 굉장히 ‘자극적인’ 요소가 많다. 영화를 n차 관람하며 하나하나 뜯어볼 만큼 소위 말하는 떡밥 천국이다.
서울에 살 때에도 크게 서울의 정취와 낭만에 대해 동요하지 않았었는데. 영화 속 견우와 ‘그녀’가 처음 만나 데이트하고 정을 쌓아가는 주요 배경인 서울은 왠지 모를 따스함과 낭만이 뚝뚝 흘러넘친다. 이조차 지금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2025년의 서울은 낭만이라는 들뜬 이미지보다는 어느덧 피로가 잠식한 조금은 가라앉은 형상을 하고 있다.
아무튼 사람들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색깔 있는 옷을 망설임 없이 입고 다녔고, 스마트폰이 없어 유행에 약간은 덜 민감했을. 겪어보지도 않은 그때의 서울에 대한 향수가 영화를 보는 내내 은은하게 퍼지는 탓에 엽기적인 그녀는 포근한 ‘비누향’ 같은 이미지로 내게 각인되었다.
사랑을 아르켜 주는 영화
그리고 영화를 n차 관람하면서 다시금 반하게 되는 점은 영화의 연출과 구성에 있다. 시종일관 가볍고 실없는 코미디로 한껏 긴장을 풀고 웃음 짓게 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 있다.
놀이공원에서의 탈영병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견우와 ‘그녀’는 생일을 맞아 놀러 간 놀이공원에서 어처구니없게도 여자친구의 바람으로 상처입고 탈영한 군인을 만난다. 크게 상심한 군인은 ‘그녀’를 인질로 잡고 자살 협박을 하기 시작하는데 ... ‘그녀’는 눈물까지 흘리며 군인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전한다.
애인이 마음 변했다 그랬죠? 정말 애인을 사랑했어요? 스스로한테 물어보세요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아요.
정말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사랑한 게 아니에요.
오빠 같은 사람은 사랑이 뭔지 더 알아야 돼요
사랑이 뭔지 더 알려면 우리 모두 더 살아봐야 된다고요.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해 들은 탈영군인은 결국 자수를 하고, ‘그녀’가 견우에게 무사히 돌아오며 해당 에피소드는 마무리 된다. 사실 이 놀이공원 에피소드의 진가는 영화를 다시 한번 볼 때부터 드러난다. 발랄하기만 해 보였던 ‘그녀’에게 사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아픈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떠나보낸 사랑에 괴로워하던 누군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 덩달아 눈물 흘리는 여자 주인공. 그런 인물이 깨닫고서 외치는 ‘진정한 사랑’에 덩달아 탈영 군인처럼 마음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가 그렇게 일생을 다 해 궁금해하는 사랑은 인생을 더 살아 봐야 아는 거란다.

엽기적인 그녀는 처음 볼 땐 유치하고, 두 번째 볼 땐 조금 슬프고, 세 번 네 번 볼 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복합적인 감정이 들게 하는 영화다. 흔하디 흔한 키스신 한 장면조차 없지만 둘의 서사가 너무나도 애틋하고 운명적으로 느껴지는 진한 로맨스 영화이며, ‘겪어본 적 없는 세계’에 대한 향수와 갈망을, 심지어는 애정을 느끼게 하는 그런 영화다.
필름 카메라 사진 속 거친 노이즈의 앤틱함을 사랑해 마지 않는다면.
순수한 사랑을 믿고 말하는 영화가 그리운 어른이라면.
당신이 여러 의미에서 '다시 보게 될' 이 반전 영화를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