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슈만 판타지슈티케'
우리는 A 혹은 B를 계속 선택하며 산다. 점심 메뉴로 뭘 먹을 것이냐를 고르는 것 같은 간단한 문제들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인생에는 그런 쉬운 문제보다 어려운 문제가 자주 찾아오곤 한다.
얼마 전, 또 한 번 그런 고민을 하게 된 시간이 있었다. 집단 내에서 한 쪽을 위한 의견을 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양 쪽의 입장을 너무 정확히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쪽으로 잘 마무리 되길 바랐지만 상황은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 결국 어느 한 쪽을 상처입힐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내 상황을 고려해야 했다. 비겁하게도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상황이며 정말 미안하게도 내 현실 때문에 마음이 가는 선택을 하기 어렵다.
혹시 내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되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느냐’
당사자에게 이런 상황을 전하고 의사를 묻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상대가 결국 괜찮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임을 알고도 죄책감을 덜겠다는 무의식으로 한 행동임이 자명했다. 스스로가 미워졌고 차마 더 연락을 이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더 커진 고민 속에 이후 조금 더 생각의 시간을 거쳤다. 결국 나는 어떤 의견도 내지 않는 방관자의 자리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 의견을 내지 않겠다는 생각조차도 내가 피해 입을까 무서워 고민 끝에 의견을 물었다. 그래도 된다는 확답을 받자 마음이 풀렸다. 하지만 한 켠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듯한 씁쓸함이 남았다.
나는 늘 어떤 상황에서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뭔가를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건 분명 이타적인 마음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사람에게 다가가고 상황을 듣고,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을 건네는 것이 결코 가볍게 이뤄져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날 밤 친구와 공연을 봤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이었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을 들었다. 오케스트라에 어떤 악기를 왜 배치했는가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다가 문득 바이올린 솔로 파트가 귀를 사로잡았다. 수많은 악기들의 조화 속에서도 반드시 힘을 실어야 할 순간과 자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분명 작곡가 브람스는 분명한 기준으로 그 자리를 정했을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모두를 공평하게 다룰 수 없고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도 없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기준을 지니는 일이다. 그래야만 때로는 방관이 아닌 진짜 선택을, 침묵이 아닌 신념 있는 태도를 가질 수 있다.
그 기준을 지키기 위해선 어떤 행동을 해도 괜찮을 수 있을 나만의 환경을 구축해야 하고, 언제 나서도 괜찮을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고 비겁하지 않을 수 있으려면 생각에 그 기반을 토대로 살아가야 한다.
이런 마음과 깨달음으로 글을 마무리하지만, 끝끝내 이런 글을 쓰는 것 마저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합리화로 남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모두가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