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편지의 목적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데에 있다.
지금 가장 보내고 싶은 말은 결국 내가 처한 상황과 고민들과 지극히 맞닿아 있다. 이처럼 자기 본위의 목적에 기인하지만, 그렇더라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나 이외의 타인에게, 그저 단 한 명이라도 의미가 발현된다면, 이 편지는 잘 도착했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껏 살아온 순간들을 과거 현재 미래로 쪼개서 봤을 때 과거가 후회되거나, 지금이 불만족스럽거나, 앞으로 뭔가를 기대할 수 없거나. 이 세 가지가 주된 불만족의 양상이라면. 이 생각에 몰두 되어 과거에 맛본 만족의 순간을 잊었다면. 혹은 ‘지금처럼만-‘이라는 테제가 가져오는 안락과 평화를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잃었다면. 이 모든 불만족을 겪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낸다.
가끔은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렵다.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잃은 것인가? 만족의 반대항을 실망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는 자신이 그려오고 기대하던 모습을 잃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실망의 메커니즘 속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내가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들. 그리고 그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가 가져올 가능성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진행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생각들.
우리 눈 앞에 비춰지는 선택지가 넘쳐 흐른다. 뒤이어 내가 할 수 없었던 것을 선택한 사람들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신상 제품에 대한 광고들. 어린 나이에 성공한 사람들의 무용담과 떼돈 버는 방법을 설명하는 사람들. 지금 이 순간에 요구되는 필요가 아니라 추가적인 욕망과 동경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아주 많이 있다.
정보의 홍수 저 밑바닥에 휘몰아치는 불만족의 소용돌이가 있다. 너무 많은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되면서 불만족스러움이 가중된다.
불만족의 문제는 나만 겪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이다. 불만족사회에서 태어난 모든 불만족자들은 각자의 문제와 고민들, 그러니까 불만을 안고 있다. 모두가 어그러진 채 살아가고 있다.
고민과 불만을 안고 산다는 표현에 주목해보면, 그것들은 굳이 알려지지 않은 채 개인의 내부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앞에 드러나는 것은 한정적이고, 단지 모든 알 수 없는 것들은 배제된 채 해석되고 있는 것뿐이다.
자 이제 할 일을 하자. 그래도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이 주는 강한 희망이 있다. 그건 바로 내가 그리고 있는 ‘이상’이 있다는 것이다. 부풀려진 욕망이든 뭐든 간에. 어떤 게 바람직한 이상이고 그렇지 않은 건지의 여부보다 기초적인 건 이상은 그 자체로 미래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불만족사회 사는 모두가 각자의 미래에 대한 동경을 가진 채로 살아가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모두 과거에 맛본 만족의 순간과 지금이 가져오는 평화와 안락을 기억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자신이 겪어온 순간들을 반추해보면 알 수 있다. 결국은 인간은 자신을 밑바탕으로 해서 살아갈 수 있다.
아무리 불만족스럽더라도 언젠가는 과거가 될 현재를 조망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때의 자신을 믿으며 살아가자. 모든 불만족자들에게 적용되는 귀감의 말을 내뱉거나, 무언가를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의 불만족자로서 지금껏 생각해본 최선의 결론과 이에 비롯한 위로를 보낸다.
2025.08.30.
P.S. 여름의 마지막을 앞두고
그 활기차던 순간을 충분히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족을 한 켠에 남기고 있다면,
이맘때에 그런 생각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2026년 여름은 무조건적으로 우리 앞에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