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꽤 자주 홀수 무리의 교우관계에 속해있었다. 이런 관계에서는 꼭 누군가 한 명이 양보해야 하는 순간이 생긴다.
예를 들어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나 혼자가 편해서 내가 혼자 앉을게!' 나는 이런 상황에 주로 먼저 나서서 혼자 앉는 선택을 한다.
물론 혼자인 게 편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자리를 고르는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회피하기 위해서다. 버스를 타기 훨씬 전부터 아니, 집을 나서기도 전부터 이미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가득하다.
'우린 세 명인데 그러면 누군가는 혼자 앉아야 하잖아. 아, 이런 생각 하는 거 자체가 스트레스다. 자리 때문에 초등학생처럼 가위바위보 할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혼자 앉자.'
외식할 때도 비슷하다. 누군가 음식이나 서비스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면 또 내 머릿속은 파도처럼 생각들이 밀려든다. '컴플레인 안 했으면 좋겠다.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다. 같이 밥 먹기 싫다. 체할 것 같아.'
나는 그럴수록, 이 부정적 분위기를 중화시키기라도 하듯 일부러 더 밝고 친절하게 행동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배려의 아이콘이자 무던함의 끝판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매우 예민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우리 사회에서 '예민함'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통한다. '너 진짜 예민하다.'라는 말은 성격이 까다롭고 쓸데없이 유난스럽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에게 예민함은, 결코 나쁘기만 한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나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단어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 더 적절한 단어를 찾았다.

HSP (highly Sensitive Person)
매우 예민한 사람들
HSP는 비유하자면, 성능이 매우 뛰어난 '슈퍼 안테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테나가 극도로 민감해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잡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뛰어난 기술이니 장점도 많겠지만, 듣기 싫은 소음까지 다 들려오니 치명적인 단점도 공존하겠죠.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 에서는 초예민성 개념의 선구자인 일레이 아론이 개발한 HSP 검사로 서두를 연다. 이 질문지는 총 23개의 문항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 '그렇다'가 13개 이상이면 매우 예민한 기질을 가진 사람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나는 무려 19개 문항에 '그렇다'고 체크했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예민한 사람인지 모른다.
성격심리학에서 정의하는 '예민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예민함'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패턴을 보인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맞춰주고 갈등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며 심지어는 둔감해 보이기까지 한다. 진짜 예민한 사람은 예민함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타인의 감정에까지 민감하기 때문에 그 감정도 신경 쓰고 맞춰주려 한다.
HSP는 불편함과 스트레스에 대한 역치가 매우 낮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행동이 불편하게 느껴져도 상대방 또한 나처럼 똑같이 불편해질까 봐 그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갈등 상황 자체가 스트레스기 때문에 갈등의 원인을 아예 만들지 않기 위해 혼자 극복하려고 애쓴다. 갈등에 대한 두려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오는 불안함,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스트레스를, 회피를 통해 예방하는 것이다.
예민함 다루기 - 혼탁해진 흙탕물에 깨끗한 물 들이붓기
이 책의 저자인 심리 전문가 최재훈은, HSP들이 자신의 기질적 예민함을 대해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왜 그렇게 쉽게 지칠 수밖에 없었는지 공감해 주며, 예민한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을 제시한다.
단순히 "예민하게 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예민함을 강점으로 삼아 자신만의 독보적인 서사를 그려나가기를 응원한다.
책을 펼치기 전, HSP답게도 걱정과 회피로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마치 가장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편안하게 읽었던 것 같다.
'와 맞아! 너도 그래? 나만 그런 거 아니었구나.'
정말 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읽어 나갔다. 때로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된다.
"예민해서 그래."라는 말은 결국, "부정적 자극들을 소화시키는데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서 그래."라는 말과 같다.
내가 소화시킬 수 있는 자극에는 일일 용량이 정해져 있는데, 한꺼번에 너무 많은 자극이 들어오면 결국은 과부하가 오고야 만다.
그 자극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완벽하게 처리하려는 건 HSP들의 숙명같은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더 큰 스트레스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범람하는 자극 속에서 예민함을 다루는 법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 불편한 자극과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훈련을 통해 나를 지켜야 한다.
녹록지 않은 인생, 어차피 흙탕물이 될 게 뻔한데 혼탁해진 물에서 최대한 찌꺼기를 덜어내려고 안절부절못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바로 대다수 예민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삶의 모습입니다. 찌꺼기를 빼내는 일에 집중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아예 깨끗한 물을 들이부어서 흙탕물을 새 물로 가득 넘치게 만드는 겁니다.
예민한 사람들에게 취미생활이란 그런 겁니다. 혼탁해진 흙탕물에 깨끗한 물을 들이붓는 것.
예민한 사람일수록 오롯이 나만을 위한 힐링의 시간이 필요하다. 취미생활을 통해 자신이 가진 심미안을 충족시키고 수시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어야 한다. 혹시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줄까 봐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혼자 속으로 끙끙 앓는 이들이기에 더욱 내면을 단단히 채워야 한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나는 이 책을 읽기 전부터 그런 훈련을 나름대로 해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시간은 나에게 가장 확실한 힐링이자 충전의 순간이다. 혼탁해진 마음을 조금씩 깨끗하게 채워나가는 나만의 방식이다. 나는 그렇게 '창작'이라는 깨끗한 물을 내면에 들이붓곤 했다.
여전히 회피를 통해 자극을 차단하고, 불편함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누리지만 이제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았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응어리진 마음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기분이 든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불편한 자극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나는 예민한 기질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 예민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만의 언어로 풀어내는 도구로 삼기로 했다.
우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강인한 존재입니다. 스스로를 믿어보는 게 어떨까요.
온갖 회피를 통해 모은 에너지로 결국 자아실현을 이뤄내는 진취적인 회피형 인간들의 피날레라니, 참 멋지지 않은가요?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막상 닥치면 어떻게 해서든 알아서 살길을 찾아 나가게 되어 있다. 심지어 HSP들은 완벽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서 회피했더라도, 막상 마주하면 또 그 일을 완벽하게 수행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식으로 회피하면서 긁어모은 에너지를 집중시켜 내 야심을 위해 한 번에 써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진취적인 회피형 인간이 바라는 가장 멋진 이상이 아닐까.
나에게 예민함은 더 이상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다. 나를 힘들게 하지만 동시에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감각이다. 나는 이 예민함에 자부심을 느껴도 된다. 언제든 불붙을 수 있는 건조한 초원에 꾸준히 시원한 빗줄기를 내려주려 한다.
그리고 결국엔, 아주 멋진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