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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킬미나우>를 보고 난 후 머릿속에는 오랜 시간 지워지지 않을 질문과 감정의 조각들이 남았다.


사랑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감정이자 인물들이 끝까지 놓지 않는 유일한 동력으로 존재한다. <킬미나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장애의 틀을 넘어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이 가져오는 희생과 자기 소멸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존엄에 대해 질문한다.

 

 

 

보호라는 이름 아래


 

극의 중심에는 조이라는 인물이 있다. 조이는 선천적 장애를 가진 아이로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지만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호기심과 욕망을 가진 존재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그는 새로운 것에 눈을 뜨며 자립을 꿈꾸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갖고자 한다. 하지만 조이의 욕망은 종종 침묵과 외면 속에 놓인다. 장애인의 성적 욕구나 독립에 대한 욕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 같은 주제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금기시되거나 외면당한다.

 

조이의 아버지 제이크는 그를 오롯이 사랑하고 돌보는 존재이지만 그 사랑은 점차 제이크 자신의 삶을 지워나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그 무게가 얼마나 절절한 희생의 결과인지 깨닫게 된다.익숙했던 공간이 낯설게 변하고 손에 익었던 글씨조차 쓸 수 없게 되는 순간 제이크는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보호자의 존엄 그리고 돌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희생과 외로움, 그리고 때로는 자신조차 잊혀지는 고통이 극 전체를 관통한다.

 

극 속 조이의 또 다른 중요한 관계는 친구 라우디와의 우정이다. 라우디는 조이에게 새로운 세상과의 접점을 마련해주는 인물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서 조이는 비로소 자신이 기존에 접하지 못했던 감각과 경험들을 맞이하게 된다. 선글라스를 써보기도 하고 타인의 시선을 라우디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기도 한다. 라우디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조이는 보호자 앞에서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는 ‘나도 혼자 있고 싶다’, ‘내 인생을 내 방식대로 살고 싶다’고 소리친다. 독립을 선언하고 싶었던 마음은 비록 충동적일지라도 진심이었다.

 

아들과의 갈등 끝에 제이크가 건강 문제로 쓰러지게 되었을 때 조이는 선물받은 태블릿으로 겨우 119 신고에 성공하지만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다. 그가 혼잣말처럼 “원래 처음엔 다 못 알아들어요”라고 웃으며 말하는 장면은 조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무력감과 좌절을 견뎌왔는지를 보여주는 순간이다. 그 말에는 타인의 무관심과 오해를 견디며 살아온 시간이 응축되어 있고 그럼에도 그 아픔을 유머로 승화시킬 줄 아는 조이의 단단한 내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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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ll me now


 

연극의 제목 <킬 미 나우>는 처음 듣기에 도발적이고 거칠게 느껴진다. 하지만 극을 마주하고 나면 그 말이 단순한 절망이나 포기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문장은 누군가의 비명을 닮았지만 동시에 간절한 기도처럼 들리기도 한다. 삶과 죽음, 돌봄과 자립, 사랑과 책임 사이의 격렬한 감정이 응축된 외침이기 때문이다. ‘누가 삶을 선택할 권리를 가지는가’, ‘사랑이 과연 모든 것을 감내하게 하는가’.

 

그 질문들 속에서 킬 미 나우라는 문장은 어느 순간 하나의 선언이자 고백처럼 다가온다. 쉽게 내뱉을 수 없는 그 말은 오히려 인간 존재의 깊은 층위와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닿았을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언어이다. 결국 킬 미 나우는 죽음을 말하면서도 오히려 더 강렬하게 삶을 이야기하는 제목이다. 그것은 극의 중심을 지탱하는 감정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말이며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과 타인의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문장이다.

 

 

 

우리 모두는 원래 미운 오리니까


 

연극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상징은 작은 고무오리와 욕조이다. 무대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이 소품은 단순한 물리적 배경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장치로 작용한다. 초반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씻기며 함께 있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씻기며 작별을 준비한다. 이때 욕조라는 한정된 공간은 두 사람 사이의 삶과 죽음을 오가는 경계가 된다. 고무오리는 그 공간 안에서의 일상을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어린 시절의 추억, 그리고 끝내 맞이하게 되는 이별의 순간까지 함께한다. 오리 하나로 시작해 오리 하나로 끝나는 이 구조는 단순하지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무심코 흘려보내는지, 그리고 그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작품의 마지막 커튼콜 장면 역시 인상적이었다. ‘조이’를 연기한 배우가 아직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무대 위에 남아 있었고, ‘제이크’ 역의 배우가 그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는 모습은 연극이 끝났음에도 그 인물들이 여전히 무대 위에서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관객은 극장을 떠나면서도 무대 위 인물들을 머릿속에 오래도록 간직하게 된다. 극의 감정선은 무대를 벗어나 현실로 이어지고 우리는 그것을 마음속에 품은 채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 ‘삶’과 ‘사랑’에 대해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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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미 나우>는 불편한 진실을 감추거나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부딪히며 관객에게 감정적 회피를 허락하지 않는다. 장애인의 욕망, 죽음에 대한 결정권, 가족 구성원의 균열과 회복까지 연극은 삶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복잡하고 아름다운지, 그리고 그 끝자락에서조차 우리는 사랑을 통해 서로를 지탱할 수 있음을 이 작품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이고 그 끝은 누가 결정하는가, 사랑과 희생의 경계는 어디인가, 장애인의 욕망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연극은 그 답을 내리기보다는 질문 자체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연극이 던진 질문들에 쉽게 답할 수는 없지만 그 질문 자체가 우리 사회와 개인에게 꼭 필요한 성찰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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