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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삶과 죽음의 플래시백 [영화]

민규동의 <파과>가 건네는 것

by 이지선 에디터
2025.06.12 01:36

 

 

시작이 아닌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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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원점에서부터 출발하기 마련이다. 빅뱅으로 말미암아 온 우주가 탄생했듯이. 이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영화 <파과>의 시작이 보여주는 원점은 어딘가 묵직하다. 어쩌면 ‘시작’이란 말보단 ‘처음’이란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거의 비슷한 맥락에서 혼용되는 말이지만 사전적 의미로는 후자가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시작’은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 또는 그 단계’를 말한다. 말하자면 ‘시작’이란 말 자체가 ‘처음’이란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또한 무언가를 이루거나 하게 한다는 점에서 술어 명사에 해당한다. 반면 ‘처음’은 ‘시간적으로나 순서상으로 맨 앞’을 가리키는 말로 뒤에 ‘-하다’가 붙어 파생 동사를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정적인 명사다. 무언가를 시작이 아닌 처음으로만 정의할 수 있다면 거기에도 동일한 차이가 기인할 것이다. ‘손톱’이란 가명을 얻기 전, 소녀 민설화의 삶은 어떠한가. 이 모든 이야기의 처음에 그녀는 어떻게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는가.

 

민규동의 <파과>는 구병모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온전히 해명되지 않은 원작의 구멍들을 상업영화적인 문법으로 봉합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이는 감독의 주관적 해석이 반영되는 지점이므로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직결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각의 옛 이름, ‘손톱’이 탄생하게 된 경위이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추위에 떨다 정신을 잃은 설화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치던 류와 그의 아내에게 구조된다. 그리고 그들의 가게에서 설거지를 돕는 조건으로 숙식을 제공받는다. 그릇을 닦다 다친 자신의 손가락을 치료해 주는 류 앞에서 설화는 수줍은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을 겁탈하려는 미군을 뿌리치다 죽여버린 것을 류에게 들킨 순간, 세상을 다 잃은 듯 무너져 내린다. 제발 여기 있게 해달라는 그녀의 구걸에는 단순히 생존만 달린 것이 아니다. 그녀의 깨진 손톱이 방역 업자로서의 출발점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조각은 훗날 ‘처음으로 쓸모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회상한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도 주며 자신을 가족으로 맞이해준 사람에게 부여받은 이름은 그녀의 삶 자체가 된다. 그렇게 노인이 되기까지 그녀의 행적을 함축하는 듯한 감각적 몽타주(montage)와 함께 타이틀 로고가 이어지며 오프닝 시퀀스가 막을 내린다.

 

이후로도 류와 함께한 과거는 현재의 사건과 함께 전체 서사의 또 다른 기둥으로서 조각과 관객의 시선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며 영향을 미친다. 현재로 전환된 무대는 조각의 노년에 발생하는 균열을 비추면서 출발한다. 여기서 그녀에게 다가올 미래를 암시하는 듯한 인물이 등장한다. 초엽에게 ‘여성 호르몬 과다’라는 꾸지람을 듣는 장비는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조각에게 산세베리아 화분을 선물하는 섬세함을 간직한 남자다. 자꾸만 조각을 챙기는 이유에 대해 ‘세월의 무게’라는 답을 내놓는 그가 노인을 학대하는 요양 보호사를 방역하는 업무를 맡게 된 것에는 어떠한 인과성이 엿보인다. 하지만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하려는 순간 나타난 죽은 딸의 환영에 그는 제때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결국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그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조각이 나선다. 좀처럼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조각을 보다 못한 투우가 나선 뒤에야 그는 스스로 눈을 감는다. 죽을 때가 되면 그리웠던 사람이 마중 나온다는 말을 남기면서. 장비와의 전투로 크게 다친 조각은 혼미한 정신으로 차를 몰다 옆좌석에 나타난 류의 환영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칼끝에 사정을 두지 말라고 했지.” 충돌과 함께 급정거하는 차 안에서 조각은 결국 의식을 잃는다.

 

류는 의식을 되찾은 그녀를 치료해 준 강 선생의 모습과 교차하며 다시 나타난다. 매치컷(match-cut)은 조각의 현재와 공명하는 과거의 장면들을 보여줄 때 자주 사용되는 핵심적 연출이다. 자신의 손가락에 밴드를 붙여주는 류를 바라보는 설화의 얼굴과 자신의 손바닥에 붕대를 감아주는 강 선생을 바라보는 조각의 얼굴을 통해 관객은 조각이 강 선생에게 류를 겹쳐 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겹침은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것을 넘어 마치 현재의 일부와도 같이 느껴진다. ‘플래시백(flashback)’은 과거의 회상을 나타내는 장면 혹은 그 기법을 가리키는 말이자 현실에서 어떠한 단서를 접했을 때 그것과 관련된 강렬한 기억에 몰입하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이다. 플래시백이 단순한 회상과 구별되는 특징은 ‘재현’에 있다.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를 다시 체험하는 순간 현실은 사라지고 모든 감각이 뒤바뀐다. 강 선생의 손길을 통해 65세의 조각은 16세의 민설화로 되돌아간다. 말하자면 심리적 플래시백이 영화적 플래시백을 통해 형상화되는 것이다.

 

 

 

가장 깊은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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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증상 가운데 하나다. 프로이트와 브로이어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이나 사건으로 인해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처로서 ‘트라우마(trauma)’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트라우마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전쟁, 자연재해, 교통사고, 범죄 등의 심각한 사건으로 발생하는 질환이다. 그렇다면 평생을 이런 끔찍한 환경 속에서 살아온 사람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이 트라우마가 된다. 토마스 홈즈와 리처드 라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건은 배우자의 죽음이다.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럽고 폭력적인 죽음으로 인한 상처는 말하자면 트라우마 중의 트라우마가 될 확률이 높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제시한 ‘원초적 장면(primal scene)’이라는 개념을 어머니로부터의 분리와 거세라는 최초의 상실로서 발전시켰다. 원초적 장면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모든 외상과 결핍의 근저로 남아 평생을 좌우하게 된다. 트라우마의 본질적 특성은 반복과 침습이다. 조각의 기억 속에 원초적 장면처럼 자리하던 류의 죽음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며 퍼져 나가는 균열이 <파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설화가 류와의 만남을 통해 손톱이라는 이름과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았듯이, 손톱은 류의 죽음을 통해 조각이라는 이름과 함께 또 다른 삶의 국면을 맞이한다. 아내의 원수를 갚으려다 목숨을 잃은 류를 대신해 28명을 한꺼번에 방역한 조각은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다. 원수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폐허를 비추는 장면에서 걸어 나오는 것은 젊을 적이 아니라 나이 든 모습의 조각이다. 그 가운데 류가 설화의 손가락을 치료해 줄 때 흘러나오던 음악, Danny Boy가 아련하게 울려 퍼진다. Danny Boy는 전쟁터로 떠난 아들을 그리워하는 노모의 마음을 노래한 곡으로, 아일랜드인들의 평화적 독립 시위가 무력 진압당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사연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생전의 류와 나눴던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는 약속을 반드시 완수하고야 말겠다는 듯, 그날 이후 조각은 눈물과 감정을 버리고 냉철함과 실력을 겸비한 최고의 킬러로 거듭난다. 짐승 발톱이란 뜻의 새 가명은 그렇게 그녀에게서 인간성을 빼앗아 간다.

 

손실장에게 그녀의 소싯적 무용담을 전해 들은 투우는 의문에 사로잡힌다. 그렇게나 대단했던 사람이 왜 갑자기 사사로운 인연들에 쩔쩔매는지에 대해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없으며, 억압된 것은 언젠가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 시기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녀의 뇌척수액에 쌓이는 단백질 침전물과 함께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손 떨림처럼, 류가 남기고 간 것들은 계속해서 그녀의 현재 속으로 틈입하며 일상을 뒤흔들어놓는다. 그 뒤틀림을 최초로 목격한 인물이 투우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줄곧 조각을 눈여겨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사사건건 조각의 앞을 가로막으며 훼방을 놓는가. 조각의 처음이 류였다면, 투우의 처음은 조각이었기 때문이다.

 

 

 

투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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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우는 <파과>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메인 빌런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목표물의 주위를 천천히 맴돌다가 그가 미치기 직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그의 방식은 다분히 과시적이다. 투우가 자신을 습격한 목적을 묻는 구 사장에게 그는 “유명해지려고”라 답한다. 신성방역의 사무실에 온 목적에 대한 손 실장의 질문에 “레전드”라 말하며 조각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투우의 눈빛에는 이채가 반짝인다. 신성방역의 기록실에 몰래 침입한 그가 뒤지는 것은 조각의 오래된 방역 보고서들이다. 거기서 한 명의 신상명세서를 발견한다. 뒤통수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남자를 처음 발견한 것은 어린 날의 투우였다. 아버지가 사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도영의 섬뜩한 눈빛은 오늘날의 투우와 무척 닮아있다. “이제야 네놈이 누군지 알겠네”라는 조각의 말에 눈을 번뜩이는 모습은 그가 그녀를 찾아온 목적을 어렴풋이 드러낸다.

 

하지만 그가 노리는 것은 단순히 조각의 목숨이 아닌 듯하다. ‘천천히, 고통스럽게’라는 그의 작업 모토 때문일까. 그렇다 쳐도 여전히 미심쩍다. 그가 불만을 드러내는 순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맨 처음 투우가 조각을 찾아왔을 때, 그는 장비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조각에게 “벌써 이렇게 늙으면 어떡해”라며 비아냥거린다. 두 번째로 찾아왔을 때, 강 선생이라는 목격자를 남기고도 살려두는 조각을 위협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찾아왔을 때, 신성방역을 떠날 테니 강 선생을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조각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나이 들어보니 연민과 죄책감 같은 감정들이 샘솟냐며. 조각이 강 선생을 대신해 병원장을 죽이자, 병원장의 아들로 대리인을 위장시켜 강 선생에 대한 의뢰를 조각에게 떠넘긴 투우는 자신의 목적을 ‘평등한 파멸’이라 밝힌다.  

 

귀가하는 강 선생을 구하기 위해 아파트 계단을 뛰어오르는 조각의 모습은 아내의 복수를 위해 떠난 류를 찾아 계단을 뛰어오르는 손톱과 번갈아 교차하며 긴박감이 조성된다. 과거의 배경 속 손톱은 중간중간 현재의 모습과 뒤바뀌는데, 그녀가 손톱에서 조각으로 거듭나던 순간을 보여주는 이전의 시퀀스에서 등장한 조각과 같은 옷차림이다. 피범벅이 된 류 앞에 주저앉아 울먹이는 손톱의 모습은 불안한 예감을 자아내지만, 투우는 단지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을 생각이었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구냐는 조각의 질문에 그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답한다. 그녀는 지킬 게 있으므로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다는 투우의 말에는 그동안 그가 집요하게 그녀에게서 단념시키려 했던 것이 함축되어 있다. 그는 ‘세월에 무게’에 짓눌리는 그녀가 못마땅한 듯하다. 본래의 날카로움을 잃고 자꾸만 무뎌지는 그녀, 평소와 다른 곳을 바라보는 그녀가.

 


 

파과(破果)와 파과(破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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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 여성 킬러라는 설정에서 알 수 있듯 ‘늙음’은 <파과>를 관통하는 핵심 소재 가운데 하나다. 자신의 예전 같지 않은 몸을 하루하루 목격하며 직장에서도 퇴물 취급을 받는 조각은 세상의 활기로부터 멀찍이 소외되어 있다. 늙고 병들어 버려진 강아지 무용을 거두기로 한 것은 이러한 소외감에 대한 동병상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강 선생의 어머니 윤 여사는 뭉그러졌다고 사람들이 안 사 가지만 더 맛있다며 흠집 난 과일, 파과(破果)를 조각에게 덤으로 얹어준다. 윤 여사의 과일 가게를 떠난 조각은 강 선생에게 뒤를 밟히며 그를 습격하는 환상에 빠져든다. 의식을 잃은 강 선생의 뺨과 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과 표정은 익스트림 클로즈업(extreme close-up)되어 생생하게 전달된다. 조각이 버려진 아이를 구한 ‘좋은 사람’이라는 강 선생의 말에 그녀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무용에게 복숭아를 나눠주며 그녀는 묻는다. “네 생각에도 내가 좋은 사람 같니?”

 

그러나 투우는 조각의 들뜬 마음을 일부러 짓이기듯 그녀에게 강 선생을 바라볼 자격은 없다고 말한다. 파과를 바닥에 내던져 짓밟는 투우를 바라보는 조각의 눈빛은 담담하면서도 설움과 좌절이 엿보인다. 투우가 자리를 떠나고 텅 빈 골목에 혼자 남겨진 그녀의 옆모습은 냉장고 앞에 선 옆모습으로 서서히 디졸브(dissolve)된다. 어두운 공간의 연속성은 그녀가 느끼는 감정과 결부된 쓸쓸한 정취를 강화한다. 싱싱함을 잃고 흉하게 문드러진 채소 칸 속 복숭아들을 보여주는 인서트(insert)는 젊음을 박탈당한 조각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노인들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늙고 병들어가는 몸, 둔탁해지는 정신이 아니라 그것을 자연스러운 섭리가 아닌 부끄러운 것으로 규정하는 젊은 세상의 잣대이다. 그러한 손가락질에 쫓기고 쫓겨 절벽 끝에 내몰린 노인들은 자신을 쓸모없고 짐이 되기만 하는 존재, 이미 역할을 다해 사회라는 무대에서 이만 퇴장해야 하는 배우처럼 여기며 자책하기도 한다. 조각은 류가 신성방역을 지키라며 선물한 비녀를 자신의 목에 겨눠보지만 이내 단념한다.

 

그녀와 대립하는 신성방역의 또 다른 인물은 류의 아들인 손 실장이다. 조각을 대모님이라 부르면서도 호시탐탐 내쫓을 기회를 엿보는 손 실장에게 식칼을 들어 보이며 그녀는 “아직 쓸만해”라고 응수한다. 신성방역의 운영을 위해 수익은 크지만 질 낮은 의뢰를 수락하고 수익은 작지만 정당성 있는 의뢰를 거절하는 손 실장에게 조각은 신성방역의 설립 명분을 주지시킨다. 40년 묵은 금싸라기 땅을 헐어버리고 싶지만 늙은 사자 한 마리가 알 박기로 버티고 있다며 한탄하는 손 실장의 모습은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갈등을 보여준다. 효율성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세상의 빠른 흐름 속에서 전통과 신성함, 공동체 등의 철학적 가치는 고리타분한 것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걸쳐 꿋꿋이 살아남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조각은 자신을 일부러 사지에 내몬 손 실장의 술수를 간파하고 당당히 살아남는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손 실장을 단숨에 제압하는 그녀의 모습은 노쇠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파과(破瓜)는 이팔청춘, 즉 나이 열여섯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녀가 류를 만난 나이가 16세라는 점은 의도된 설정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녀의 시간은 이제 거꾸로 흐르고 있다. 

 

 

 

정신분석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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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은 인간의 행동이나 욕망을 단순히 과거, 특히 유아기의 삶을 통해서만 설명하려 한다는 이유로 자주 비난받아 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사건 이후(after the event)’라는 개념을 통해 반박될 수 있다. 이는 어떤 경험이나 인상, 기억들이 이후의 새로운 경험들 속에서 변형된 형태로 다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원초적 장면과 트라우마는 현재의 회상을 통해 굴절되어 만들어지는 사후적 재구성물이며, 사실은 아니지만 그 자체로 인간의 진실이라는 점에서 허구적 진실(fictional truth)이다. 따라서 정신분석의 시간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며 과거는 현재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가 된다. 인간은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가지만 과거는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된 결과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정신분석의 사유는 <파과>의 미학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투우의 재채기가 카페 손님이 들고 온 꽃다발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조각은 집에 돌아와 방역 기록을 뒤지기 시작한다. 마당에서 재채기하는 도영을 창밖으로 내다보는 조각은 돋보기 안경을 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후 한성도 일당과의 전투를 계기로 둘이 회포를 푸는 장면에서도 아버지가 쓰러진 현관문을 여는 투우와 피 묻은 망치를 들고 서 있는 조각은 모두 현재의 옷차림 그대로다. 이는 강 선생을 구하러 가는 조각과 류를 구하러 가는 손톱이 평행편집(parallel-cutting)되는 시퀀스에도 동일하게 사용된 연출인데, 사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는 교차편집(cross-cutting)과 평행편집의 기준이 모호해진다. 

 

조각과 투우의 과거는 각자의 기억과 해석을 통해 각자의 심리적 현실 속에서 재구성된다. 과거의 배경에 현재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과거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를 통해 굴절된 내면 풍경이자 편집을 거쳐 재생되는 허구적 장면임을 암시한다. 그들의 과거는 현재와 다른 시공간에 있다고 단정할 수 없는 비결정의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같은 시간과 다른 공간이라는 교차편집의 조건은 무의미해진다. 시공간의 좌표를 비트는 정신분석적 인식론은 앞서 언급한 매치컷을 통해서도 효과적으로 형상화된다.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조각과 투우, 류와 손톱은 같은 구도를 통해 수평적으로 배치된다. 물잔을 들이키는 투우와 술잔을 들이키는 손톱의 교차는 기침과 함께 쓰러지는 투우와 손톱의 교차로 이어지고 둘이 유사한 과거를 공유하고 있음이 본격적으로 암시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과거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이 좀처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은 허구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과거의 속성에 대한 반증이자 허구적 진실에 대한 두 사람의 마음이 아직 공명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럼 내가 왜 찾아왔는지도 알겠네”라는 자신의 말에 “직접 죽여도 시원찮을 판에 해묵은 복수를 시시하게 남의 손에 맡겨야 되겠어?”라고 응수하는 조각을 바라보는 투우의 표정은 충격과 좌절이 뒤섞인 것처럼 보인다. 투우의 진심은 둘이 해피랜드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는 장면에서 마침내 드러난다. 액션 신의 동작과 매치컷되어 삽입된 플래시백을 통해 도영이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다정하게 돌봐주었던 조각을 가족처럼 여겼음이 밝혀진다. “우리처럼 혼자 남겨질 게 뻔하잖아”라는 말과 “제발 나를 보라고”라는 말에는 자신을 두고 간 조각에 대한 미움과 그럼에도 그녀가 자신을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애정이 담겨있다. 라캉에 의하면 모든 말은 요구이며, 모든 요구는 사랑에 대한 요청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머니와의 분리를 통해 처음으로 상실을 경험하며, 잃어버린 어머니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은 언어에 스며들어 모든 사랑의 근간이 된다. 어른이 되면 찾아가기로 했던 약속을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각에게 상기시키려 하는 투우의 모습은 그녀와 함께한 과거보다도 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다. 

 

투우가 남긴 사랑의 언어들은 그의 그림일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나타나는 그의 문장들을 하나하나 발견하는 것 또한 <파과>의 백미다. 류가 죽어서 조각의 소망이 되었듯 자신이 죽는다면 조각의 소망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과 죽고 나서야 자신이 누군지 밝힐 용기가 생길 겁쟁이라는 걸 알았다는 말은 어쩌면 투우의 죽음이 의도된 것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진실은 오직 그의 안에 있다. 원작에 대해 가장 자주 언급되는 논의 가운데 하나는 투우의 심리이다. 투우가 왜 조각에게 접근했고 강 선생의 아이를 납치하며 인질극을 벌였는지에 대한 단서가 원작에는 비교적 적게 나타난다. 민동규는 이와 같은 질문에 나름의 대답을 내놓는다. 물론 그 과정에 과도한 센티멘탈리즘이 개입했다는 비판의 여지는 존재하지만, 투우의 내면세계라는 거대한 공동을 가로지르는 민규동의 다리는 나름의 설득력과 무시 못할 울림을 지닌다.

 


 

상실을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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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조각은 끝까지 도영과의 약속을 떠올리지 못한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주마등이 켜진다는 조각의 말이 거짓임을 눈치챈 투우는 말한다. “당신은 아직 갈 때가 안 왔나 보네.” 우리가 주마등을 보는 이유는 뇌가 지금까지의 경험과 기억 속에서 죽음을 피할 방법을 찾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조차 우리의 몸은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늙어가면서도, 죽어가면서도 우리는 늘 살아있다.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죽음 충동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기 전까지 프로이트는 트라우마가 반복되는 이유가 과거의 고통을 소급적으로 다스리고자 하는 무의식의 경향 때문이라고 보았다.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가라앉았다가 마치 빌려 간 돈에 대한 청산을 요구하듯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주마등도, 플래시백도 우리가 살아있고 살고자 한다는 증거이다. 그녀가 가진 삶에의 의지는 그녀의 노쇠한 몸, 그녀가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과는 무관하다. 마지막 시퀀스는 이를 증명하는 듯하다.

 

창밖으로 뛰어내리려는 조각에게 “나도 데려가면 안 돼요?”라고 묻는 도영과 죽기 직전의 류에게 “제발 나 두고 가지 마세요”라고 애원하는 손톱의 모습은 애처로울 정도로 닮아있다. 류가 손톱을 두고 떠났듯 조각은 도영을 두고 떠났다. 투우와 마주함으로써 상실의 주체이자 대상이 된 조각은 상실의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지켜야 할 것을 만들지 않는 것은 지켜야 할 것을 잃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녀가 감정을 절제해 온 것은 단순히 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약속이 너무나 아파서인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사실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잊힌 과거의 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치료적 성공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과거가 허구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것을 재구성하는 주체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진실을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조각과 도영이 해피랜드에 대해 나눴던 과거의 대화는 플래시백과 현재 시점의 대사가 교차하며 제시된다. “같이 해피랜드 가면 안 돼요?”라는 과거의 질문에 현재의 조각은 “그럴까?”라고 말하지만, 투우는 과거에 조각이 대답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온화한 색감의 빛 속에서 먼지들이 환하게 흩날리는 가운데 숨이 끊어진 투우를 끌어안은 조각의 뒷모습은 롱 쇼트에 담겨 따뜻하면서도 비통한 정서를 자아낸다. 조각은 투우의 슬픔을 통해 자신의 어린 날, 손톱의 슬픔을 만난다. 압도적인 상실 앞에서 너무나 무력했던 과거의 그녀 자신을 말이다. 자아의 기능을 강화해 주체의 사회적 적응을 돕는 자아 심리학과는 달리, 정신분석은 자아의 방어기제를 깨뜨림으로써 주체가 스스로 자신의 진실과 마주하게 한다. 조각이 깨달은 진실은 류와 손톱이 재를 올렸던 절에서 조각이 투우의 재를 올리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류, 당신이 지킬 걸 만들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야. 우린 결국 다 부서지고 사라지는 존재일 뿐인 거지. 그런데 상실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투우는 조각은 지킬 게 있고 자신은 잃을 게 없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말했지만 결국 투우는 죽고 조각은 살았다. 조각은 투우와의 관계를 마주하고 자신과 강 선생의 딸 해니를 동시에 지켜냄으로써 마침내 상실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단순한 허구와는 달리 과거는 잊히거나 억압될 뿐 결코 없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 과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지만 온전히 기억될 수도 없고, 항상 변화하는 현재의 관점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된다는 것. 이를 수용하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 치료의 핵심이다. 과거가 늘 현재와 함께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진정한 미래가 펼쳐진다. 재를 마친 뒤 절을 나선 조각은 문득 비탈 위를 올려다본다. 조각의 시선이 닿자 등을 돌려 사라지는 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조각의 얼굴은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이어서 사이비 목사를 방역하러 나선 조각의 모습은 장비의 딸 은호의 죽음이 목사 때문이라는 초반부의 언급을 상기시킨다. 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큰 상실을 경험한 망자에 대한 예우이자 지켜야 할 것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다는 조각의 결단이 엿보이는 지점이다. 이처럼 상실의 과거는 여전히 조각의 곁에 남아있지만, 이제 그녀는 그것과 동행하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서 시작으로



정신분석에서 애도는 의미 있는 애정 대상을 상실한 후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는 과정을 말한다. 상실로 인해 멈춰버린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애도이다. 처음의 상처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목소리로 발음한 뒤에야 인간은 비로소 시작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이들에게 소리 내어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이다. <파과>는 작별에 대해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지만 온몸으로 작별을 말하고 있다. 사랑에 대한 수많은 정의만큼이나 작별에도 무수한 의미가 깃들 수 있다. 


어쩌면 작별은 더 이상 사랑을 요청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작별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어쩌면 작별은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자, 상실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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