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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예술대상을 받기도 한 고선웅 연출가의 오랜만의 신작 소식에 많은 연극 애호가들이 관심을 쏟고 있다. 나 역시 <유령>이라는 짧고 강렬한 제목과 'I'm nowhere'라는 부제를 보며 공연 내용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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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초반부 이지하, 강신구 배우의 슬로모션과 함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러브 스토리> 음악이 깔리는 순간 이미 이 블랙코미디에 반했다.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는 장면에 <러브 스토리> OST라니. 중반부에도 언급되는 '오상필의 변명'은 이미 거기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이 극은 그런 '배명순'을 비롯한 무연고자 유령들의 서사, 그리고 현실 속 배우들의 소동이 뒤섞여있는 형태다.


전자의 경우, 백신애 소설 <광인수기>의 현대적 확장판을 보는 것처럼 몰입감 있게 명순의 서사가 펼쳐졌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 가명으로 새 삶을 시작했지만, 세상은 '사람 면허'가 없어진 그녀를 예비 범죄자 취급하며 몰아세운다. '광인' 취급을 받는 <광인수기> 주인공처럼, 자신이 낸 최후의 용기가 그대로 약점이 되어버리고 마는 비극적인 상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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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연극은 비극에만 잠식되지 않는다. 명순이 구타당하는 장면이 끝나자마자 분장사가 등장해 '언니, 분장하고 갈게요!'라는 대사를 칠 때부터 이 극의 독특하고 당당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더 나아가 중반부 강신구 배우의 악역 거부를 시작으로, 제4의 벽을 깨고 나온 배우들의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지며 많은 관객들이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실제 대본이 몹시 궁금해질 만큼 대사와 상황을 배우들이 너무나 잘 살려 연기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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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유령들의 서사에서 우러나오기보다 그러한 소동의 와중에 직접적인 대사로 표현된 것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또, 클라이맥스가 되기 전 철학적인 물음들이 이어지는데, 대사 하나하나가 빠르게 증발해 버리는 연극의 특성상 관객들이 온전히 따라가기는 버거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무연고자, 그것도 죽은 무연고자들을 주인공으로 세운 작품이라는 것만으로 무척 소중하다. 최근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의사, 변호사, 경찰 등 비슷한 직업군의 사람들만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마치 그게 이 세상의 대부분인 것처럼.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다. 있어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 연극에 등장하는 자살한 노인, 객사한 고아 출신 노숙자, 암으로 찜질방에서 혼자 죽은 가정폭력 피해 여성 같은, 우리 사회의 유령들이다. 무연고자 외에 빈곤층, 장애인 등 약자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나라는 놀라울 정도로 약자에게, 약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무신경한 사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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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은 삶과 연극 자체에 대한 짙은 사랑과 고민을 바탕으로, 유령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인생이라는 무대엔 연출 없이 배우들만 있고,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그런데 치과에 갈 때처럼, 인생의 고통도 견디다 보면 끝나게 된다고. 아사리판 같은 연극도 결국은 다 끝이 나고 퇴장한다고. 이번 생에선 그냥 그런 역할을 연기했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또 나름의 삶의 의미도 찾고, 가볍게 떠나가라고.


굿 장면에서의 무대 연출이 모든 것을 압도하며 극을 마무리 지었다. 커튼콜에서 배우들이 자신들보다도 먼저 세 명의 흰 천을 향해, 위쪽의 유령을 향해, 뒤편의 안치실을 향해, 그리고 무대를 가득 채운 묘비석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현대인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혐오가 아닌 연민과 관심의 힘을 전하는 극 <유령>이었다.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22일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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