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는 미래의 양상을 극단적으로 유도하는 작품일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인간 사회의 변화 양상은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 내에서 미래는 하나의 원동력처럼 사용되곤 한다. 확률로만 존재하는 세계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스토피아적 세계와 유토피아적 세계를 나누듯, 인간의 미래가 반드시 극단적인 양상을 지니라는 법은 없다. 아이가 없는 세계에서 마침내 태어난 아기는 그 자체로 희망적 표본이다. 전쟁과 이민자,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시대이지만, 가능성만으로도 함의된 세계의 지속은 그 자체로 희망을 자아낸다. 엔딩과 함께 나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크레딧 이후 암전된 화면에서 나온 ’ Shantih Shantih Shantih‘는 미래의 암시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칠드런 오브 맨>)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이끄는 SF는 거대 기업의 자본 독식과 더불어,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을 보여준다. 나아가 끼인 생명체의 존재가 인간의 위치성을 위협하고, 외부로 퇴출되지 않기 위한 발악을 보여주곤 한다. 마침내 존재의 분투가 성공할 경우, 인간은 도구로 전락하고 신체는 파괴된다. 캡슐에 갇힌 인간들의 상태가 비쩍 말라 있거나, 기계의 굉음을 두려워하면서 기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지하로 파고드는 경우가 그렇다. 다만 인간의 허락으로 내부로 유입될 경우, 이들은 하나의 구성원 자리를 보장받는다. 이것이 SF의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를 가로지르는 신체의 차이점이다.
인간이 서로에게 상호작용을 하듯, 인간 내부에서도 상호작용이 이어진다. 신체의 훼손은 비단 호러 장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신체를 변형시켜서, 인간의 미래를 예측하곤 한다. 신체의 변화는 일종의 기술로 만들어낸 인공적 진화다. 다만 인공적 진화에게 따라붙는 태생적 딜레마에 대한 해결은 요원하다. SF 장르의 신체 변형, 사이버네틱스 신체는 이러한 딜레마 속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극단적인 형이상학적 질문을 내포하는 듯하다. 신체가 기계로 완전히 치환된 인간은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만 극단적인 형이상학적 질문에 지친 관객들은 새로운 답안을 요구한다. 온통 기계로 대체된 인간들이 즐비한 세상. 양극화가 극심해진 도시에서 죽음은 새로운 게 아니다. ‘어떻게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죽는지 중요하다.’라는 기치 아래서, 주요 인물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사이버 사이코‘가 될 각오를 한다.(<사이버펑크 : 엣지러너>) 사이버 사이코시스는 기계로 대체된 신체가 정신적 영향을 가져온다는 가상의 질병이다. 사이버 사이코시스의 발현은 주위에 있는 인간에 대한 공격성과 상호작용의 불응을 가져온다. 다르게 말하면 기계로 대체되는 인공적 신체에 대한 딜레마를 사전에 차단한다. 인간이 대체할 수 있는 사이버네틱스는 한계가 있으며, 정신과 신체는 곧 연결되어 있다는 일종의 인간 해석적 기반을 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떠한가? 우리는 영웅을 기다리거나, 끼인 생명체를 기다리는 세상에 도달하고 만 것인가? 아니면 사회에 기초하는 생산성을 상실한 채, 파괴되는 세상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SF는 여러 대답을 내놓았다.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무엇이 인간을 정의하는지 의도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스포츠 장르와 공포 장르와 다르게, 이 두 메시지의 결합으로 인간 존재의 규정을 내리려는 의도성은 마침내 관객에게 도달할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SF 장르를 보는 관객들은 무의식적인 메시지를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정신과 육체만이 살아남는 세계. 극장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우리는 영화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신체 반응을 확인한다. 곧 육신만이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