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그날’이 한 달가량 남았다.
11월만 되어도 모두가 손을 꼽아 기다리는 크리스마스!
하지만, 나는 오늘 겨울 냄새 물씬 나는 크리스마스 이야기 대신 반대로 여름 냄새가 나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제는 정말 떠나버린 여름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나는 크리스마스 하면 자연스레 함께 떠오르는 날이 있다. 본디 겨울보다 여름을 더 좋아하는 내가 크리스마스처럼 챙기는 여름의 하루. 말하자면여름의 크리스마스. 양력 6월 21일. 24절기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낮이 길다는 것이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도 시치미를 떼며 고집 있게 하늘에 떠 있는 해를 보면 왠지웃겨 웃음이 피식 나올 지경이다.
어두운 것보다 밝은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여름과 낮의 조합은 행복 그 자체다. 그러니 ‘하지’를 사랑할 수밖에.
처음에는 이 ‘하지’가 무엇인지도, 며칠인지도 몰랐던 나였지만 여름을 좋아하며 알게 된 절기다. (본디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계절의 절기까지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지독함 탓에) 낮이 일 년 중 가장 길어져 무려 14시간 35분이나 된다고 하는데, 이런 날을 내가 그냥 넘어갈 리가 있는가.
나는 그 더운 날씨에 꾸역꾸역 짐을 싸기 시작했다.
미피가 그려진 귀여운 도시락에 시원한 토마토도 담고, 체크무늬 파우치도 넣고, 표지가 예쁜 에세이 한 권도 챙기고, 필름 카메라까지 챙겼다. 그렇게 에코백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돗자리를 울러 멘 채로 무작정 집을 나섰다. 어디로 갈지는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길었기에 이러한 여유도 가질 수 있었다.
고민 끝에 가기로 한 곳은 ‘강정고령보’. 넓은 들판과 강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버스가 정말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알고 보니 강정고령보로 가는 버스의 배차 간격이 길어 도무지 올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평소같았으면 이렇게 기다리다 내가 좋아하는 해가 떠 있는 시간이 다 가버리진 않을까 싶어,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하짓날은 달랐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작지만, 든든한 그늘에 몸을 숨겨 버스가 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이 정도면 버스 사고가 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문이 열리자마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기다리느라 쌓였던 피로가 확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사히 강정고령보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환승을 위해 한 번 더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런데 난 그냥 그 먼 길을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어서. 편의점에서 금방 샀지만, 날이 더워 금방 미지근해져 버린 밀크티와 조그마한 손 선풍기, 그 두개만을 믿고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점점 땀이 마르기 시작했다. 주위가 시원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숲길로 걷다 보니 저절로 시원해지는 공기에, 지쳐서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던 풍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질서 없이 이리저리 나 있는 풀도, 치렁치렁 자란 풀도 다 신기하고 좋았다. 꼭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인 ‘이웃집 토토로’ 속 한 장면 같았다. 들고 온 필름 카메라 속에 이 순간의 풍경들을 가득 담았다.
어느덧 강정고령보가 보이기 시작했다. 들뜬 마음에 주섬주섬 돗자리를 펼쳐가며 잔디밭으로 걸어갔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역시 사람이 몇 없었고, 난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돗자리를 깔았다. 돗자리에 앉아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토마토 꺼내먹기’였다. 걸어온 것이 고되긴 했는지 목이 말랐던 것. 그래서 토마토로 수분 충전을 해주고, 부는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도 정리해 가며 또 한 번 온몸으로 여름을 느꼈다. 그렇게 간단히 배를 채워주고 가져온 에세이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누워서 읽다 보니 집중이 잘 안됐다. 결국 책을덮고 가만히 누워만 있다가 돗자리를 정리해 자리를 옮겼다.
옮긴 자리는 다름 아닌 바로 앞에 강이 보이는 벤치. 앉자마자 문득 ‘아, 이거 맥주 없이는 안 되겠다.’ 싶어서 후다닥 근처 마트에서 작은 캔 맥주 하나도 사 왔다. (이게 안주 없이 맥주를 마신 나의 첫 경험이었다!) 에세이를 꺼내 책을 안주 삼아 마시기도 하고, 필름 카메라로 해가 천천히 져가는모습을 찍어보기도 했다. 이렇게 하짓날의 해도 저물어갔다. 천천히, 느릿느릿. 어느 때보다 길고 알차게 느껴진 하루였다.
고작 낮의 길이가 길어진 것뿐이지만, 꼭 내 하루도 함께 길어진 느낌이 든다. 하루가 길어진 느낌이 드니 마음에 저절로 여유도 생기고, 모든 것을느긋하게 바라볼 힘이 생겼다.
이런 소중한 경험을 하고 난 후로 나는 하지가 다가오면 괜스레 마음이 들떴다. 또, 어떻게 길고 긴 낮을 가득 채워 보낼까 하는 기대감에. 그렇게 나는 매년 겨울의 크리스마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넌 여름이 좋아, 겨울이 좋아?’라고 물으면 질색하며 겨울이 훨씬 좋다고들 대답한다. 연이어 겨울이 좋은 이유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당연지사 ‘크리스마스가 있잖아’라는 답도 함께 나오고. 그렇다면 우리 여름에도 기다릴 하루를 하나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지처럼. 여름의 크리스마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