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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 by Yang EJ (양이제)]

 

 

이전 글에서는 책이나 영화 속 등장인물 등 구체적인 사례에 관해 글을 썼습니다.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본 글은 박정태 저자의 <철학자 들뢰즈, 화가 베이컨을 말하다>를 읽은 최근의 제 독서 경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책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철학을 토대로 화가 베이컨의 작품세계를 분석합니다. 책의 초장은 본격적인 분석에 앞서 들뢰즈의 가장 기초적인 이론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는데요. 들뢰즈의 이론, '일의적 존재론'을 세계-인간-사건 순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나갑니다. 제가 주목한 부분은 바로 이 '순서'입니다. 세계라는 거대한 집합체에서 인간이라는 아주 작은 존재, 그리고 이 작은 소단위가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식인 사건까지. 마치 먼 산을 바라보다가 땅속을 파헤쳐 씨앗을 관찰하고,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새싹이 움트는 풍경을 바라보듯이, 책의 시선이 극단적으로 움직인다고 느꼈거든요. 영상으로 치자면 서서히 피사체를 확대하지 않고, 중간 과정을 생략한 와이드-클로즈업 샷의 반복 같았습니다.

 

사건은 인간보다 수적으로 앞서는 단위입니다. 예를 들어, 아무개 씨가 길을 걷는다고 해봅시다. 곧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아무개 씨가 길에 박혀있던 돌에 걸려 넘어진 것이지요. 여기서 아무개 씨 외 다른 행인이 길에 있든 없든, 결론은 같습니다. '돌에 걸려 넘어진다'는 사건이 일어나려면, 개인과 돌이라는 환경요소, 즉 최소 둘 이상의 존재가 필요하단 것이죠. 아무것도 없는 길에 홀로 넘어졌더라도 똑같습니다. 넘어진다는 사건은 넘어지는 주체가 결국에는 곤두박질칠 지면 혹은 표면을 필요로 합니다. 만약 부딪힐 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개 씨는 끝없이 하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넘어진다고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떨어진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겠죠. 더 나아가 우리는 같은 논리를 '떨어진다'는 사건에도 대입해 볼 수 있습니다. 떨어지는 것 역시, 떨어지기 전 주체가 딛고 있을 면이 존재해야 합니다. 단차가 있어야 떨어지는 게 가능할 테니까요. 우리는 아무개 씨가 돌에 걸려 넘어지거나 홀로 넘어지든 혹은 떨어지든 모든 사건은 아무개 씨와 돌 또는 면, 즉 두 가지 이상의 존재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를 종합해 봅시다. 복수(複數)를 뜻하는 '세계', 개인인 '인간', 최소 두 가지 이상의 존재를 포함하는 '사건' 세 가지를 크기순으로 나열하자면, 세계-사건-인간 순이 됩니다. 그런데 책은 세계-인간-사건 순으로 설명했고요.

 

물론, 책의 목차가 잘못됐다고 할 수 없습니다. 들뢰즈의 개념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짜인 순서일 테지요. 실제로 저는 책을 읽으며 이 순서가 알맞다고 느끼기도 했고요. 책의 구성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단지 들뢰즈의 이론과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계-인간-사건'의 순서에 매력을 느낀 것이지요.

 

이제 다시 세계-인간-사건이라는 나열에 집중해 봅시다. 먼저, '세계'를 살펴볼까요. 세계는 앞서 말했듯, 복수를 포함합니다. 생명이 전혀 살지 않는 행성이 있다고 한들, 우리는 그 세계를 향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메마른 세계도 세계라 부릅니다. 왜일까요? 이 무(無)의 행성은 복수입니다. 아무것도 살지 못하지만, 진공의 우주에서 행성이라는 형체를 이룰 수 있는 건 그 안에 수많은 원자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생명, 즉 인간이 없더라도 세계는 여전히 복수입니다. 무인 행성이 세계라 인정받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순서 면에서 세계-인간은 적절해 보입니다. 개인인 인간이 복수의 세계를 앞지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라면 우리는 다시 한번 난관에 부딪힙니다. 인간이 두 가지 이상의 존재로 구성된 복수, 사건을 앞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사건의 순서는 다시금 의문을 낳습니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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