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림 읽는 법>에는 무제 타이틀을 남기는 아티스트들의 경향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흥미로웠던 것은 "한 작품의 제목이 무제일 때, 작품의 감상에 대한 감상자들의 관심이 적어지며 이해도도 낮아진다"는 한 연구에 대한 언급이었다.먼저 작품을 보고 그다음 제목이 무엇일지 상상하는 재미로 전시를 즐기는 내게 무제는 가끔 당혹감을 주기도 한다. 이런 제목이면 어떨까 하고 진짜 제목을 보러 다가간 순간 마주한 무제 혹은 'untitled'는 생각을 멈추게 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보는 사람에게 작품의 의미를 부여할 공간을 제공하고자 했던 현대 미술 아티스트의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다. 무제는 관람객이 직접 작품에 이름을 붙여보게 하며 상상력의 폭을 넓혀줄 수도 있고 <무제>라는 타이틀 자체가하나의 작품에 대한 의사표현이 되기도 한다. 작품을 표현할 완벽한 언어적 표현이 있는 것이 오히려 행운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언어가 모든 세계를 대변할 수 없지만 제목을 통해 감상의 재미를 얻는 감상자에게 무제는 아쉬운 제목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무엇이 예술을 구성하는가? 라는 질문에 언어 또한 포함되어야 할까?에 대한 답은 언어가 얼마만큼의 역할을 작품에 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여의도 FC 몰에서 인기리에 전시되었던 타나카타츠야의 미니어처 라이프 전시는 제목이 작품 감상하는 흥미를 고조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선례이다. 미니어처들은 번역됨에도 불구하고 말맛을 살린 제목으로 감상자에게 '아하'하는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알차게 뽑자'의 작품에서 '알'은 뽑기에서 나오는 생선알을 의미한다. 이처럼 언어유희를 활용한 제목들은 감상의 재미를 더해주기도 했다.
언어를 거부한 화가도 있지만 언어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활용한 현대미술도 많다. 대표적으로 "This is not a pipe"라는 파이프 그림이 떠오른다. 청강으로 현대 미술사 수업을 들을 때 접할 수 있었던 그림이다. 이때 학우들이 언어와 커뮤니케이션과의 관계에 대해 저마다의 생각을 나누었다. 언어는 단지 추상적인 것일 뿐이며 이미지, 즉커뮤니케이션 수단이란 반응과 그림은 그림일 뿐 실재를 재현하지 못한다는 반응도 있었다. 결국 모든 상징 체계의 존재 목적은 '소통하기 위함'에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동시에 상징 그 자체로는 소통의 역할을 할 수 없음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상징의 기제가 서로에게 통해야 소통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세계와 감상자의 세계를 연결하기 위해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것 외 해석적인 언어 도구가 과연 필요할까? 파블로 피카소는 '설명이 어디에 좋은 것인가? 화가는 하나의 언어만 가진다.'는 말을 남기며 작품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티스트가 남긴 작품 자체가 충분한 소통의 언어이기에 문자 체계의 언어는 불필요한 설명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림 읽는 법의 저자는 "작품을 통해 보이는 것이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초월한 하나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책 <영화의 역사>에서 "현상이란 경험이어서 언제나 지나가며 나중에야 우리의 언어적 사고능력에 의해 포착되고 해설된다'고 했다. 결국 모든 것은 문자로 표현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림을 보고 감상을 표현해야 우리의 해석은 '감상'이라는 지위를 얻는다.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 속에 담아만 두면 실재하지 않는 감정이 된다. 작가의 세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으로서 감상자를 본다면 작품이 세상에 내놓아지는 것은 작가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의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그림의 언어든, 문자 언어든 중간 역할을 하는 무언가는 꼭 필요하다.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하는 또 다른 작품으로는 Joseph Kosuth(조셉 코수스)의 One and Three Chairs가 떠올랐다. 이 작품은 하나의 의자를 3가지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의자의 사전적 정의, 실제 의자 형상을, 이를 사진으로 찍은 이미지를 나란히 전시하고 있다. 사람들이 실제 형상을 기억하는 방식에 있어서 언어와 이미지가 주는 감상은 다를 수 있음을 느끼게 한다. 조셉 코수스는 언어는 우리가 지식을 배우고 사유하는 방식이자 경험을 해부하게 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3가지 방식은 모두 똑같은 의자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언어와 이미지가 서로 다른 기억을 감상자에게 남긴다면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것 또한 작품의 또 다른 감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할 수도 있겠다.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올바른'이란 단어는 멀게 느껴진다. 작품의 해석은 오로지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했던 아티스트의 마음의 힘이 합쳐진 결과다. 현재는 정해진 지식보다도 주관적인 해석과 의미 부여가 더욱 중요해진, 상호 텍스트성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다양하고 열린 해석을 지향한다는 같은 목적에서 오히려 언어는 단지 해설의 역할만 하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때론 감상자의 무한 상상력의 날개를 활짝 펴지 못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