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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떠날 채비

by 한정아 에디터
2024.08.31 11:08

 

 

떠날 채비를 한다.

 

반 년간의 독일 생활. 분명 손꼽아 기다려오던 순간임에도 생각만큼 유쾌하지만은 않다. 챙겨도 챙겨도 두고 가는 기분이랄까. 롱패딩을 압축하고, 진통제를 챙겨넣고, 필기구를, 충전기를 쑤셔 넣어도. 내 침대 위에 있는 인형이, 책상 위에 있는 책갈피가, 식탁 위에 있는 무드등이. 눈에 밟힌다. 28인치 캐리어는 너무 좁다며 우는 소리를 내보고. 더 큰 백팩을 찾아와도 도저히 성에 차지 않는다. 이 생경한 마음은 어디에서 언제쯤 어떻게 익을 수 있는걸까.

 

고등학교 3년 내내 기숙사 생활을 했다. 생각해보니 거주지가 바뀌었던 경험은 그게 다였다. 내 기억 속 이사는 한 번이 없고, 볼 것 없는 이 좁은 도시에서 18년 정도를 살았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이 근방이었다. 대학교도 2년 내내 통학을 했다. 지하철이 하루의 8분의 1 정도를 잡아먹었지만. 나는 집밥이 먹고 싶었고 기숙사가 지겨웠고 엄마가 좋았다. 그러니까. 나의 몸과 마음은 항상 여기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떠난다는 건 원래 이런건가요? 당장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서서 이삿짐 옮기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다. 돌아오는 대답은 아마- 네. 다 그렇죠 뭐- 와 같은 것이려나. 떠난다는게 이런거구나. 찜찜한 것. 괜히 한번 더 뒤돌아보고 싶고. 하루만 더 있고 싶은 것. 떠날 날이 정확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잠든 나에게 안대를 씌워서 어느날 갑자기 인천공항에 데려다 놓으면. 적어도 이런 싱숭생숭함은 느끼지 않아도 될테니 말이다.

 

며칠간 지속되는 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해부하고 들여다보다 보니 별 생각이 다 든다. 평소에 잘 할걸- 평소에 많이 봐둘걸- 과 같은 뻔한 레퍼토리는 물론이고. 나는 항상 여기에 있었고, 주변이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움직이는 거였구나- 하는 생각. 이토록 적극적인 떠남이 처음이었을 뿐.

 

나는 이미 무수히 많은 공간을 사람을 기억을 떠나오고, 떠나보냈던 것이구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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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던진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찬, 오래 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 기형도, 여행자

 

여기 내가 사랑하는 시가 있다. 기형도의 여행자. 왜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자주 읽게 된다.

 

떠난다는 건 세 단계. 머물고, 이동한다, 새로운 곳으로. 나는 지금 1단계와 2단계의 그 중간 어디쯤. 머묾이 끝나고 이동이 시작하기 바로 직전. 이동할 수 있다는건 머물었다는 것이고, 새로운 곳이 있다는 건 머물었던 곳이 있었다는 것... 그렇게 내가 겪어야 할 떠남은 늘리고 확대하여 생각해보니. 이 거대한 '떠남'은 모두를 포용한다. 모두가 떠나는 사람. 모두가 여행자. 거창하게만 보이던 떠남을 해체하니 겁이 많던 나도 무섭지 않다.

 

고통받는 자아를. 어지러운 삶을. 목적 잃은 청춘을. 압축한 기형도의 시처럼. 내가 할 것은 그저 오래 된 잡동사니의 절그럭 소리를 듣고, 모퉁이 노파와 술집 고양이에게 눈길 받는 것에 실패하고, 다음 행선지를 울부짖는 것이다. 도전과 안주, 익숙함과 낯섦을 넘나들며. 손목 걸고 맹신하다가도 뒤통수도 한 두번 내어주고.

 

그렇게 오늘도 얼렁뚱땅 떠나고 떠나면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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