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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 되기 전의 나는 스물넷의 너머를 상상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너무 먼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내일의 모습을, 한 달 뒤의 모습을, 일 년 뒤의 모습을 종종 그려보았던 것 같다. 분명 크게 달라질 것은 없고 괄목할 만한 성장도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스물넷이라는 나이는 스스로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했다.

 

왜 아득하다고 느꼈을까. 스물넷이 되어보니 서른이라는 나이도 멀지 않았음이 이토록 와닿는데.

 

그러나 어느 날에는 또 서른도 아득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나온 삶의 궤적과 그 속에서 사라져버린 순수한 감정들이 앞으로의 날들도 예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식으로 내게 제언할 때 아마 그러한 생각이 들 것이다.

 

스물이 되고 나면 누구나 어떤 변화를 겪는다고 하는데, 이십 대가 되고 나면 그 나이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특정 경험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다고 하는데 스물넷이라는 나이가 되어 스무 살부터의 삶을 반추해 보니 뭐가 그렇게 달라졌나 싶다. 서른이 되어서 스물넷의 나를 떠올리고 돌아볼 때 변함없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될까 조금은 섬뜩하다.

 

sundial의 <24>는 나를 딱 그만큼 섬뜩하게 만드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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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24 now

Still at my parents house

Thought I would have it figured out

Friends getting married, one has a baby

I barely recognize this town

Mama asked me what my plan is for the future

But I don't even know what's going on for dinner

I'm 24 now,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Parties end before I'm drunk

Friday night I'm tired as fuck

I don't know how I ended up like this

Can someone tell me what the hell I missed

 

 

제대로 취해보지도 못했는데 취하기도 전에 파티가 끝났다니. 내 인생에서 잔치는 언제부터 시작되어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던 걸까. 난 그 잔치에 어떤 사람들을 초대하고 또 내보냈을까. 좀 더 멋있게, 화려하게, 달콤하게 파티를 구성할 수도 있었을 텐데. 모두가 웃고 떠드는 금요일 밤에 이토록 피곤해하는 나에게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기에 잔치는 계속될 수 있다. 시작된 적 없는 잔치의 끝을 망상하는 일은 그래서 여전히 가능하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최영미 시인의 시를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나와는 달리 이 사람은 자신 인생의 잔치가, 다시 말해 이십 대의 잔치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아는 사람이구나. 시 속에 담긴 자기고백과 반성적 태도, 환멸과 회한의 정서, 당시 세태에 대한 일종의 폭로 따위는 내게 중요치 않다. 잔치가 아닌 것을 잔치라고 착각했다 해도,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저 그 사람이 스스로 잔치라고 인식한 인생의 짧은 한 토막이 궁금하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라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마침내 스물넷이 저물고, 그도 떠날 것이다.

 

지금은 내 옆에서 무언가를 주고받으며 함께 나아가는 사람도 언젠가는 자신에게 맞는 신발을 찾아 떠날 것이다. 그것은 스물넷이 되기도 전에,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나에게 스며들어 새로운 새벽을 위해 상을 차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한 자리를 만들 것이다. 함께 이런저런 사람들을 맞이하고 그들이 어떠한가를 유심히 지켜본 후 차분하게 얘기를 나눌 것이다.

 

그런 사람이 내게 찾아올 것이기에 스물넷이 끝나고 난 뒤에도, 서른이라는 나이를 뛰어넘고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과도, 내 과거와 미래 전부와도 나는 상관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무엇인가를 상실하면서도 다른 무엇을 새롭게 기다린다. 내게서 떠나간 사람들은 모두 그러한 기다림을 만들어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잔치도 아마 시작되었거나, 어쩌면 끝이 났을 텐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속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서른이 되지도 않았고 아득하게만 느꼈던 나이에 이 노래를 많이도 들었다. 어제와 오늘 사이의 거리가 스물넷과 서른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혹은 아찔할 정도로 짧다. 우연히도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모두 1994년에 세상에 나왔다. 서른이라는 나이를 이야기하는 두 작품이 그때부터 함께 나란히 걸어왔다는 생각도 해본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오늘 하루를 흘려보내더라도 언젠가 비어가는 가슴속에서 반드시 다른 무언가를 찾게 될 것임을 안다. 지금 당장은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최영미 시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도 어렴풋하게만 그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니 잔치였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잔치다.

 

스물넷이라는 나이도 이제 반년 가량 남았다. 2021년에 앨범 <24>를 발매한 sundial의 혼성 멤버인 김지수와 도로시찬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을까, 하고 문득 궁금해진다. 그들이 서른이 되면 <30>이라는 앨범을 내주기 바란다.

 

아마 서른이 지나서도 그 노래를 놓지 못하고 재생하게 될 것이다. 듣고 또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이십 대를 되돌아보며 '아, 잔치였구나!'라고 혼자 되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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