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에 터를 잡고
학창시절에는 몰래 쓰는 노트가 있어서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마다, 3개월 정도의 간격으로 뭔가를 남기곤 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노트는 분명 저만 볼 수 있는 곳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들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피를 차지하다보니 나중가서는 놓을 공간도 여의치 않았고요.
하지만 직접 손으로 펼쳐볼 수 있고, 당시의 필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생생한 감각이 살아있습니다. 막 쓴 글씨이거나 글자 사이 간격이 좁다면 조급함을, 느슨한 글씨이거나 간격이 넓다면 여유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거겠죠.
아날로그의 경우에는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적게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볼펜보다는 샤프 펜슬을 선호하는 편이라 쉽게 지울 수 있었겠지만, 지우개 가루가 남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니 가능한 한 번에 적기 위해서 머릿속에 최대한 온전한 문장을 생각하려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서 가장 즐겨 이용하는 글터는 네이버 블로그입니다. 수능 시험이 끝나자 마자 시작하게 된 블로그는 그로부터 수년이 넘게 지난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블로그를 운영한 이후에 더 많이 쓰게되었습니다. 현재로서 임시저장 글이 무려 700개에 육박하니 말입니다.
이 이후로 글쓰기는 제 일상에 포섭되었습니다. 매일같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디지털 글터를 열어둡니다. 사유하는 순간이라면 내내. 그리고 뭔가가 생각나면 가능한 빠르게, 즉시 적어내려 합니다. 디지털 글터를 사용하면서 '쓰는 것'이 덜 번거로워진 것이 이것에 한몫한 것 같습니다.
사실 제게서 아날로그 방식은 무심코 폐기된 지 오래됐습니다. 현재는 디지털 사료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아날로그가 주는 무게와 다르게 느껴지는 건 사실입니다. 특히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대를 모두 겪어왔기에, 양자가 갖는 확연한 물성의 차이를 알고 있다는 것이 영향을 많이 끼칩니다. 따라서, 디지털 글쓰기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습니다.
간편한 디지털 앞에서는 글을 '적는' 노력을 덜 하게 되고, 더해서 이미지나 영상 등에 기대게 되는 게 가장 큰 함정인 것 같습니다. 더 빨리, 더 많이 적을 수는 있을지언정 글 한 편이 주는 무게감과 밀도는 옅어지는 것이죠. 이럴 때일수록 의식적으로 글터를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