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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라는 계절이 참 그렇다. 책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자꾸 여름을 닮은 어떤 것들을 선택하게 만든다. 밤공기는 선선하지만 낮 온도는 27도에 육박하던 5월의 어느 날. 더위가 무르익기도 전에 다가올 한 여름을 닮은 영화, 에릭 로메르의 <녹색광선(Le Rayon Vert)>을 보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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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광선(Le Rayon Vert)>의 주인공 델핀은 긴 여름휴가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돌연 휴가를 함께하기로 한 친구에게서 약속을 취소당하고, 델핀의 여름휴가는 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된다. 델핀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친구들에게 하소연한다. 이 긴 여름을, 기다려온 바캉스를, 대체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어. 친구들은 저마다의 방안을 제시한다. 혼자서라도 여행을 가보는 건 어때?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보는 건 어때? 처지를 한탄하던 델핀은 친구들의 제안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고개를 젓는다.

 

델핀은 혼란하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불편하다. 여름은 이렇게나 긴데,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계획 없이 한탄만 늘어놓는 델핀에게 친구들은 좀 더 적극적일 순 없냐며 타박한다. 결단을 내려야 하는 사람은 결단을 내리지 않고, 결단을 부추기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점점 커져간다. 친구들의 타박에 나름의 반박을 하던 델핀은 혼자서 눈물을 흘린다. 결국 뭐라도 해야 해. 그녀는 친구의 가족이 있다는 쉘부르에 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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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부르에 도착한 델핀은 부둣가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그는 요트를 가지고 있다고 했고, 저녁 식사 이후의 만남을 제안한다. 그를 보며 웃던 델핀은 갑작스레 제안된 만남에 당황하며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그리곤 자리를 뜬다. 친구 가족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델핀은 불편하다. 채식을 지향한다는 델핀에게 사람들은 가정된 상황을 그녀 앞에 들이대곤 대답을 요구한다. 친구들 앞에서도, 낯선 타인들 앞에서도 델핀은 계속하여 뭔가를 반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쉘부르에서의 시간을 견디지 못했던 델핀은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자연을 사랑한다던 그녀는 산으로 향하지만, 그 여정마저도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서 끝난다. 어딘가로 떠났다가도 금방 집으로 돌아오는 자신이 싫어진 델핀은 자꾸만 눈물이 난다. 혼자는 외롭지만 같이 있으면 불편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파도에 자유로이 몸을 맡기고 싶다가도 그 앞에서 발길을 돌리고야 마는 델핀은 자기 안의 혼란에 어쩔 줄을 모른 채 그저 눈물만 흘린다.

 

눈물을 흘리는 델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란다. 이게 대체 무슨 맥락에서 비롯된 눈물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짐작조차 안 되는 그녀의 슬픔을 달랜답시고 여러 말들이 건네지지만, 모두 공허할 뿐이다. 눈물의 맥락은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을 터.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진 델핀은 새로운 상황과 사람 앞에서 그저 도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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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따르면 녹색 광선은 그것을 본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의 감정 속에서 더 이상 속지 않게 해주는 효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 광선이 나타나면 헛된 기대와 거짓말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일단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된다."

 

- 『녹색광선』, 쥘 베른

 

 

이렇듯 불확실에 가득한 델핀에게도 확실한 믿음이 하나 있다. 바로 ‘녹색’과 관련한 행운이다. 쉘부르에서 파리, 파리에서 비아리츠로 향한 델핀은 여전히 혼란한 자기 처지에 낙담하며 홀로 부둣가를 산책한다. 그러다 부둣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녹색 광선의 존재를 알게 된다. 항상 타인이 ‘진심’이길 바라면서도 본인조차 ‘진심’이 뭔지 몰랐던, 그렇기 때문에 혼란했던 델핀은 녹색 광선의 존재가 흥미롭다.

 

역시나 혼란했던 비아리츠에서의 짧은 휴가가 끝나고, 델핀은 다시 파리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한다. 그곳에서도 예기치 못하게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하지만 왠지 대화가 불편하지 않다. 직업을 말하고, 취향을 묻고,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눈 상대는 어쩐지 아무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델핀은 한 번 더 용기를 내기로 한다. 그를 따라 그의 행선지인 생 장 드뤼로 향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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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장드뤼에 도착한 델핀과 남자는 마주 앉아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본인조차 진심이 아니고, 심지어는 진심이 대체 무엇인지도 모르는 델핀은 타인의 진심이 의심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랑이 쉽지가 않다고.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알아가는 것조차 힘들다고. 대화를 마친 두 남녀는 길을 걷다 한 가게 앞에서 발을 멈춘다. 델핀은 ‘Le Rayon Vert(녹색광선)’이라고 쓰여진 간판을 보고 지금껏 믿어왔던 ‘녹색’의 행운을 떠올리며 전율한다. 어쩌면, 지금이라면, 이 사람이라면. 그녀는 즉흥적으로 그에게 함께 노을을 볼 것을 제안한다.

 

지는 해를 바라보던 델핀은 결국 눈물을 흘리고, 결국엔 목격하게 된다. 보게 되는 순간 진심을 알 수 있다는, 그 선명한 녹색 광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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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녹색 광선이 실제로 신묘한 힘을 가져서, 델핀이 그 순간 상대와 자신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광선이 드러난 뒤의 델핀의 감격에 찬 목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 이제껏 자기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진심으로 믿어보고자 노력했던 시도의 보상이고, 주저함과 두려움 없이 누군가와 함께 되기를 바랐던 염원의 ‘허락’일 것이다. 그야말로 그린 라이트, 델핀이 부여한 녹색 광선의 의미는 그로 하여금 신탁이자 신호가 되었다.

 

결국 이 모든 회피와 도망의 여정이 쌓아올린 염원은 결말의 희망을 위한 과정이 된 것이다. 어떤 외로움에, 또 어떤 선택의 기로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할 회피와 도망은 결국 녹색의 광선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 희망의 상징을 담은 미신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그것이 설령 누군가에겐 별 볼 일 없는 미신일지라도, 그것을 믿는 당신에게는 하나의 확신이자 신호가 되었으면. 그걸 이유 삼아 한 번 더 자리를 박차고 나아갈 용기를 내어 볼 수 있었으면. 그렇게 당신 안의 슬픔마저 용기의 발판으로 새로이 탈바꿈할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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