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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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너에게도 말한 적이 있을 거야. 흔히들 우주선을 배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우주에서는 바다에서 배가 조난되듯 우주선이 처참하게 침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공격을 받아 파괴될 수는 있어도 어딘가로 가라앉을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이야. 엔진이 고장 나거나 연료가 바닥난다 해도 그냥 그 위치에 머무르는 거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그 말, 사실은 거짓말이었어. 우리는 평상시에도 이 깊고 깊은 우주 한구석에 조용히 침몰해 있어. 창문도 하나 없는 잠수함처럼.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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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의 주인공 ‘나’는 우주인, 그리고 그의 연인 ‘너’는 지구인이다.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스페이스 오페라지만 외계인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인간이라는 점은 동일해도 우주에서 나고 자라 중력을 모르는 우주인과, 중력 없이는 우주 멀미를 하는 지구인이 나올 뿐. 같은 인간임에도 우주인과 지구인은 서로가 외계인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먼 존재다.


170시간을 날아가서는 겨우 40시간을 너와 함께하고, 다시 180시간을 돌아오는 나는 너의 뜨거운 연인이자, 우주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이다. 소설은 내가 너에게 보내는 편지로 전개되며 너를 향한 마음, 그리고 정체불명의 적함과의 전황이 뒤섞여 나온다. 


연애 전선에서도, 실제 전선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너무나 먼 거리 탓에 생기는 불분명함이다. 30광초 거리, 그러니까 빛의 속도로 움직여도 30초가 걸리는 거리에 적군이 있다면 그들을 최대한 빨리 탐지하고 공격해도 1분(30초씩 왕복)이 걸린다. 전쟁에서 이 시간은 너무나 긴 시간이고 1분 후에 적군이 제자리에 있다는 보장도 없다. 연애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1분도 아니고 35분 28초가 필요하다. 레이저 광선을 받아야 할 적군이 제자리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내 사랑을 받아야 할 너도 제자리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알아들었다니까. 나도 사랑한다고.”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뭘 확인하고 싶은 건데? 심장이라도 꺼내달라는 거야?”


(…) 그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런 거였어. 그냥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날아온 거리만큼, 그 지긋지긋한 우주 공간만큼 사랑하는 거라고. 그래서 너를 한자리에 매어두고 싶다고. 하지만 그 말은 할 수 없었어. 정말 너를 매어두는 게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p.37)

 

 

널 향한 사랑과 불안으로 떨던 나는 우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지구에 정착해 너와 함께하는 상상을 한다. 실제로 그럴 작정이었다. 책의 제목처럼, ‘청혼’할 생각이었으니. 그러나 몇 번의 편지와 몇 번의 전투와 일련의 시간을 거치며 나는 너에게서 멀어지기를 망설임 없이 선택한다. 멀어진다면 그 불분명함은 더욱 커질 텐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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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소설 속의 ‘나’가 아니라 이 글을 쓰는 나)는 인간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대신 모든 사랑이 나의 확장을 향한 사랑일 뿐이라는 데 동의한다. 사랑은 공감, 그러니까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에서 기반하는데, 그러면 이게 결국 더 커다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나의 확장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데서 이 믿음을 고집할 필요가 불분명하긴 하지만 어쨌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주장(다시 말하지만 소설 속 ‘나’가 아니라 글 쓰는 내 주장). 이에 대해 너무 매정하다 말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난 이 나름의 로맨틱함이 있다고 믿는다. 널 나로 생각하는 것이니까. 날 너로 생각하는 것이니까. 


너에게서 멀어지기를 선택한 나(이제 다시 소설 속의 ‘나’)의 마음도 이것이 아닐까. 널 나로 본다고 해서 불분명함이 해결된다는 것이 아니다. 개인에게는 저 자신을 아는 것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니. 불분명함은 여전하지만, 차이점은 보답에 있다. 널 나로 본다는 건 더 이상 너에게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에게서 무얼 더 바랄 수 있을까.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 사랑을 하는 것이 전부다. 


 

반드시 돌아올 거야. 이상하지? 나 같은 우주 태생이 어딘가로 돌아올 생각을 하다니. 

이제 나도 고향이 생겼어. 네가 있는 그곳에.

 

(p.153-154)

 

 

사회학자 김광기 교수가 자신의 저서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에서 말하길, ‘고향은 떠나야만 생기는 것이다. 떠나지 않고서는 고향이란 있을 수 없다(p.248)'. 제임스 볼드윈은 고향을 “떠날 때까지는 없는 것이고, 떠나면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설명하며, 하이데거는 고향이 오직 “추방 속에서만 빛난다”고 말한다. 


우주에서 태어나 고향이랄 것이 없던 나는 너를 사랑하고 나서야 고향을 가진다. 그 고향을 자각한 순간 나는 너에게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멀어진다.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에서 나오듯이, 고향은 고향에 돌아가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떠나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나는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말한다. 돌아’갈’ 거라는 게 아니라 돌아’올’ 거라고. 마치 내가 지금 너의 곁에 있다는 듯이. 나는 떠남으로써 고향을 얻고, 떠남으로써 너에게 닿는다.


책의 초반에서 나는 우주선 또한 침몰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창문 하나 없는 잠수함처럼. 가라앉고 가라앉는, 침몰. 그리고 책 말미에서 나는 또 한 번 침몰한다. 이번에는 하늘의 별처럼, 침몰한다. 

 

 

그래. 침몰하는 거야. 그 깊고 깊은 우주 속으로 말이야. (…) 우리는 그렇게 은하가 되어갔어. 함선들이 퍼져나가면서 연료를 불규칙적으로 연소시키는 모습이 마치 한 떼의 별 무리 같았거든. 반짝반짝, 아무 패턴도 없고 아무 의도도 없이 평화롭게 떠가는 한 떼의 별 무리.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별이 되고 있었어.

 

(p.138-139)

 


35분 28초의 간격에도 전전긍긍하던 나는, 정작 프러포즈 반지는 편지와 함께 동료에게 들려 보낸다. 보답을 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떠남으로써 닿고, 침몰로써 너의 별이 되고, 답을 묻지 않으면서 결혼을 청한다(請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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