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진홍빛 소녀', 사회를 향한 목소리

글 입력 2016.05.05 00:5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20160429_193948.jpg

 
2016.04.29. 금요일 저녁 8시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꼭두소극장
연극 [진홍빛 소녀] 관람


   아트 인사이트의 85번째 문화초대로 연극 '진홍빛 소녀'를 보고 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껏 본 연극중에 최고로 소름돋는 작품이었다.

   작품마다 '와, 이 작품은 000이 정말 최고였어!'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지난번에 본 '내 아이에게'는 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구성 방식(독백+코러스)과 단순한 무대 소품의 다양한 활용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라면' 같은 경우에는 뼈있는 대사들과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삶의 모습이 좋았다. 이번 '진홍빛 소녀'는 작품에 담긴 목소리가 분명한 것이 가장 큰 강점인 것 같다. 그래서 배우들의 연기, 무대 소품과 동선, 대사와 장면이 품고 있는 복선,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효과, 모든 요소가 그 '목소리'를 뚜렷하게 해주는 장치로 작용하는 것이 소름돋게 완벽하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명문대 교수가 된 이혁,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부유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있다. 그의 아내가 해외 공연으로 떠나있는 어느 날 저녁, 17년 전 연인이었던 무기징역수 은진이 찾아오며 극이 시작된다. 

   17년 전, 은진과 혁이 함께 어린시절을 보냈던 '사랑둥지 보육원'에 불이 나 교직원과 원생 51명이 전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식적으로' 보육원에서 유일한 생존자였던 은진은 방화 용의자로 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이미 부유한 가정에 입양되어 보육원에서 나왔지만, 문제의 그 날 은진을 보기 위해 남몰래 숨어들어왔던 이혁. 은진은 이 방화사건의 진위여부와 그 이전부터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보육원의 끔찍한 현실을 하나하나 파헤치며 혁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게 뭘까? 네가 맞춰봐. 제한시간은...음...
보육원이 불타버렸던 새벽 4시까지!"






   연극의 매 장면과 대사와 소품들은 어느 하나 허투루 넣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진다. 내가 '진홍빛 소녀'에서 가장 의미있다고 느낀 요소 중 하나는 오프닝 전체이다. 이 오프닝은 말이 필요 없는 복선이었던 것 같다.



법학과 교수가 된 이혁의 강의시간,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누구야? 제가 수업시간에 휴대폰 울리는 거 안 된다고 말했죠?"
그는 객석을 돌아다니며 관객들(학생들)이 휴대폰을 껐는지 확인한다.
"여러분, 방관도 죄가 되는 거 알고 있죠? 다리에서 투신하려는 사람을 보고도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휴대폰으로 영상만 찍고 있던 경우에 대해, 실제로 '살인방조죄'가 적용된 사례가 있습니다. 다음에 또 진동이 울리면, 친구가 휴대폰 안 끈 것을 보고도 말리지 않은 죄로, 짝궁도 같이 혼날 겁니다."
그리고 한창 '방관'에 의한 범죄에 대해 이야기하는 와중에 또다시 진동이 울린다.
"하. 이번에 걸린 사람, 벌로 강의실 청소하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모든 진동은 이혁 자신의 휴대폰에 온 전화때문에 울린 것이었다.
"아, 미안합니다. 강의실 청소는 내가 하는 걸로 하죠. 그럼 이걸로 수업 끝!"



   이미 프리뷰를 쓰며 시놉시스를 보고 간 나는 이 첫 장면에서부터 감탄했다. 일상적인 강의실 풍경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가 17년 전 그 날로부터 계속해서 숨기고 가려온 자신의 치부를 찌르는 강렬한 오프닝. 이후로 이어지는 극을 통해서 속속들이 밝혀지는 17년 전의 그 날, 그는 방관자였고 범죄자였다. 보육원 내에서의 은진의 처지를 알고도 모른척했고, 불을 지르고 도망쳤으며, 은진이 용의자로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침묵했다.

   '방관도 범죄다'라는 강의 내용과 '알고보니 나의 잘못이었다'는 이 두 가지가, 이 극을 관통하는 이혁의 죄이자, 은진이 이혁을 찾아온 이유인 것이다.

   또 다른 의미있는 요소 하나는 은진이 부르는 노래였다. 은진이 '원장아버지와의 상담시간'동안, 바깥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상담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도록 큰 소리로 불렀던 동요가 있다. 우리도 한 번씩 다 들어본 노래이다. 숲 속 작은집 창가에~ 은진은 이혁을 협박하는 내내 미친 사람처럼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동요의 전체 가사는 이렇다.

[숲속 작은집 창가에 작은 아이가 섰는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와 문 두드리며 하는 말

살려주세요
날 좀 살려주세요
날 살려주지 않으면 포수가 빵 쏜대요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은진은 노래를 끝까지 부르지 않고 항상 '살려주세요!'부분까지만 흥얼거린다. 나는 그 '살려주세요'가 은진의 속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부분이 [은진이 가장 바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가족’이 가지는 의미, ‘가정’을 뜻하는 가족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존재. 17년 전 은진을 지켜주겠다고 했을 때의 이혁이 진심이었기를, 그래서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주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연극을 보고 나서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공연을 보고 오신 듯한 두 분이 나누는 이야기를 언뜻 듣게 되었다.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여자가 진심으로 바랐던 게 무엇이었을까?’에 관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있었다. 문득 나도 요한오빠의 생각이 궁금해져서 똑같이 물어봤다. 오빠는 “방관자가 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했다. 은진은 그저 그 때 진짜 잘못한 것이 누구인지 이야기해주고, 사실을 인정해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이혁은 거짓으로 일관하다가 자신의 소중한 것에 위협이 가해졌을 때에야 자신의 잘못이라고 털어놓고, 위협이 사라졌다고 판단되는 순간 또다시 태도를 바꾼다. 요한오빠는 이런 모습이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인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전체적인 스토리보다는 은진의 감정선을 많이 따라갔다는 점에서 해석의 방법은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생각했던 것도 비슷하다. 이혁이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 사실은 이게 제일 어려운 것이다. 내 잘못을 인정하면 내가 무지막지하게 나쁜 놈이 된다. 이혁은 그걸 견딜 수가 없어서 계속 합리화를 하고 있다. 나도 힘들었고, 나도 죄책감에 시달렸고, 나만 잘못한 것도 아니다.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이 있고, 보육원 사람들도 잘못했고, 다들 분위기가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이게 우리나라의 전체적인 분위기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죄값을 치루면 용서받고 재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하는데, 누군가가 잘못을 시인하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물어뜯고 재기할 수 없도록 매장해버린다. 한 번 나쁜 놈은 영원히 나쁜 놈이다. 더 억울한 것은 돌팔매질 하는 사람들 틈에는 나보다 더 심각하게 나쁜 놈들도 수두룩하다. 그런데 이 나쁜 놈들은 잘못을 덮어놓고 떵떵거리며 잘 산다. 그러니 다들 ‘잘못한 사람’이 되기를 싫어하고, 나 혼자 잘못을 인정하기는 더더욱 싫어한다. 핑계를 대고, 서로 탓을 하고 잘못을 미룬다. 그래서 피해자는 분명히 있는데 가해자는 너도나도 아니라고 발뺌하고, 사건은 흐지부지, 피해자만 억울한 세상이 된다. 작품이 내고 있는 목소리는 명확하다. 잘못한 사람이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고, 더 나아가 책임을 지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못한 사회의 단면을 ‘이혁’이라는 인물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그 목소리가 더 강조된다.

   최근 우리나라는 이런 모습들이 극단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지난번 ‘내 아이에게’에서 꼬집었던 세월호 사건의 어제와 오늘도 그러하고, 지금 한창 검찰조사로 옥신각신하고 있는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 살인사건도 그러하다. 사회의 한쪽 면에서는 이런 문학작품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주고, 다른 한쪽에서는 검찰과 피해자와 피해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주어서, 이런 문제점들이 차차 개선되기를. 해가 갈수록 진실되고 온화한 사회로 나아가기를 바라게 된다.

+오프닝에서 '살인방조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혁은 무심히 세월호 사건을 언급하고 지나간다. 대본에는 없는 부분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각색과정에서 그런것도 의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진홍빛 소녀 웹페이지 작업파일 (150dpi) copy.jpg
 

[류소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2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