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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톨스토이 머릿속 탐구생활 -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공연]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역추적한 톨스토이의 머릿속

by 이유빈 에디터
2026.10.08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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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겨울이라는 촉각과 소름끼침의 청각



      어떤 뮤지컬은 그것을 볼 때면 특정 계절이 느껴진다. 나에게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가 그랬다. 겨울이라는 계절은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명료하게 느끼게끔 하는 계절이다. 살결을 에는 추위에 온몸이 떨리다가, 그 추위를 피하기 위해 부리나케 들어선 건물 안에서 비로소 느껴지는 온기를 통해 몸이 녹아내릴 때 특히 그렇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 감각을 일깨우는 장면은 '눈보라' 넘버가 나오는 장면이다. 소설과 뮤지컬의 주인공 안나는 그녀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카레닌이라는 성을 가진 남편이 있는 기혼 여성이다. 안나의 친오빠 스티바는 아내 돌리가 있음에도 외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그 가정이 분열될 위기에 처한다.

       

      이에 안나는 그를 중재하려고 기차를 타고 스티바가 있는 모스크바로 온다. 그런데 마침, 브론스키라는 백작도 자신의 어머니가 모스크바로 온다는 소식에 기차역에 나와있었다. 비극의 두 주인공인 안나와 브론스키는 그 기차역에서 브론스키 백작 어머니의 소개를 통해 처음 만나게 된다.


      그 둘은 모스크바 무도회에서 다시 만나고, 마주르카 춤을 추면서 서로의 눈빛을 확인한다. 그러나 가정이 있었던 안나는 황급히 상트페테르부르크행 기차를 타러 간다. 그런데 브론스키 역시 그녀를 쫓아 그 기차를 탔고, 환승역에 정차한 안나에게 브론스키는 다가가 그녀에게 고백한다.

       

      그때 그곳엔 거센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그 장면에서 둘은 "눈보라에 뒤덮이고 갇혀서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라고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자연 현상에 어쩔 수 없이 갇혀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 눈보라를 핑계 삼아 둘만의 세계에 갇히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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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뮤지컬은 촉각적 자극 외에도 청각적 자극 역시 상당하다. 이 뮤지컬의 첫 장면은 기차역에서 시작된다. 그곳에는 기차를 타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다니고 있다. 그런데 거기엔 마치 안나의 이야기를 관망하는 듯한 MC도 있다. MC는 이렇게 경고한다. "기차는 원하는 모든 곳에 데려다 주지만, 절대 철길로 뛰어들어선 안 된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 "끼이익ㅡ" 이건 고속으로 달리는 기차가 급정거할 때 나는 소리지 않을까?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MC가 방금 한 말 때문인지 기찻길에 뛰어든 어떤 여자의 비명소리인 것 같기도 하다. 그 소리에 놀라 쳐다본 기차역 위쪽의 안나와 브론스키는 첫 만남과 동시에 그 광경을 목도한다. 소설에서는 그 장면을 철도 노동자가 기차 바퀴에 깔려 사망하는 사고로 묘사한다.


      그러나 가장 비극적인 것은, 안나가 브론스키를 우연히 처음 만났던 날 목도했던 그 기차 사고의 잔상이 그녀의 뇌리에 불길한 징조로 깊게 남아있었으며, 훗날 브론스키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낀 안나가 직접 기찻길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죽음으로 브론스키가 평생 후회하고 죄책감을 느끼길 바랐던 그녀는, 그렇게 서로가 처음 만났을 때 직감했던 '파국이라는 불길한 징조'를 몸소 실제의 감각으로 구현하고야 말았다.


       

       

      2. 벼베기 장면에서 만난 톨스토이



      이 뮤지컬을 처음 봤던 때는 2017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 나는 휴학 중이던 철학과 학부생이었다. 뮤지컬을 보던 중 내 뇌리에 깊게 박힌 대사가 하나 있었다. 2막 중반부, 안나의 친오빠 스티바가 방정맞게 노래 부르던 구절이었다.

       


      "단순하게 봐요 세상을. 철학 따윈 집어치워!"
       


      패기 넘치는 철학과 학부생의 입장에서 내 전공을 집어치우라는 소리는 꽤 도전적이고 느닷없게 들렸다. 뮤지컬에서 갑자기 철학 얘기를 하는 것도 모자라 버리기까지 하라니. 그러고 나서 약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시간이 흐른 만큼 나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고, 그 대사에 담겼던 내용의 실체를 내 식으로 해석해볼 수 있는 틀이 생겼다. 그리고 그 해석의 단서는 소설이 출판된 19세기 후반이라는 시대적 맥락과 등장인물 레빈의 생각 속에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톨스토이라는 작가는 자신이 지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 자신의 가치관을 일부 투영했다. 그중 그가 추구하기에 마땅하다고 여긴 가치가 반영된 인물이 바로 레빈이다. 레빈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시골 영지에서 땀 흘리는 육체노동을 통해 비로소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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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황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에는 당대에 영향력 있던 독일철학, 더 구체적으로는 독일관념론 저서를 읽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소설 속 대사에서 레빈은 분명하게 말한다.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철학적 개념들은 거창한 용어를 가지고 떠들어대는 것일 뿐, 정작 알고 싶어하는 '어떻게,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답을 주지 못한다고 말이다. 레빈의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톨스토이가 가졌던 독일 관념론에 대해 그가 가졌던 반감의 실체를 조금은 추적해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독일 관념론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른 여타의 동물과 인간을 구분되게 만드는 것인 '이성'이 가진 힘을 신뢰했던 사상적 흐름이며, 칸트에서 시작되어 헤겔에서 그 정점을 이루었다. 관념론이라는 흐름을 묶는 것은 100여년에 가까우므로, 그들을 묶는 철학자들의 모든 생각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관념론이라는 단어로 묶었을 때 그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는 있다. '외부 세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세계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고 진리로 완성하는 주체는 오직 인간의 정신과 관념이다.'


      이에 대한 그의 반감이 적극적으로 작동하여 표현되는 장면은 키티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한 후 상심한 레빈이 시골 영지에 가 농부들과 함께 농작물을 낫으로 베는 2막 초반의 장면이다. 나는 그 장면에서 톨스토이(혹은 그의 전신인 레빈)가 반감을 가졌던 것의 반대 급부인 '실용성'과 '성실한 노동의 신성함'이라는 이념이 가시화되어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보이지 않는 이념 눈에 보이는 실체로 가시화하라고 한다면, 아마 이 장면이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톨스토이의 이러한 생각에 대한 찬성이나 반대 여부를 떠나 한 독일철학사조와의 연관성을 통해 톨스토이의 머릿속을 역추적해볼 수 있었던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지난했던 9년간의 궁금증이 내가 대학원에서 전공한 독일 철학을 통해 우연히 해소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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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행복을 추구한 여자들의 결말: 공적 영역의 부재와 갇힌 행복



      이 작품에는 크게 세 여성이 등장한다. 주인공 안나, 그리고 안나의 친오빠의 아내인 돌리, 그리고 돌리의 여동생이자 브론스키의 약혼녀였으나 실연당한 후 레빈과 결혼하는 키티가 그들이다. 비록 뮤지컬에서 돌리는 생략되지만, 세 여성은 모두 당대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의 여성의 모습을 실제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안나는 세 여성 중에서는 가장 현대적이고 주체적인 인물이다. 부부 관계에서도 자신의 직업처럼 아내를 관료적으로 대하는 남편 카레닌과의 정략결혼 속에서, 안나는 브론스키를 만나 비로소 사랑이라는 날것의 감정을 느낀다. 러시아의 견고한 제도와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추구하려 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철저한 사회적 매장과 기찻길 위에서의 처참한 비극이었다.


      돌리는 난봉꾼 남편을 뒀다. 그 남편은 '세상을 단순하게 보라'라고 외치던, 안나의 친오빠 스티바이다. 스티바는 돌리와 자식이 함께 살고 있는 가정집의 가정교사와 불륜을 저질렀다. 유흥에 찌들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돌리 집안의 재산까지 팔아 치우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자립할 수 없었고 결정적으로 아이를 위해 계속 그 집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키티는 자신이 청혼받을 거라고 확신했기에 레빈의 고백을 거절한 적이 있다. 그러나 청혼받을 거라 확신한 모스크바 무도회에서 자신의 약혼남 브론스키와 평소 선망의 대상이었던 안나가 예사롭지 않은 관계에 있음을 보며 절망한다. 이후 언니 돌리가 있는 시골 영지에 갔다가 레빈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농사를 짓고 영지를 돌보는 레빈을 다시 보며 그와 결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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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여성을 비교해본다면, 상대적으로 키티는 행복한 결말을 맞은 여성처럼 보인다. 자신이 열렬하게 사랑했던 남성의 사랑은 쟁취하지 못했지만, 노동의 가치를 신성하게 여겼던 성실하고 건실한 남성과 결혼하여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면 씁쓸한 공통점이 드러난다. 그녀들 모두에게는 '공적 영역'이 철저하게 부재했다는 점이다. 기존의 제도를 과감히 탈선한 안나와 같은 여성에게는 사회적 매장과 파멸이라는 끝이 기다리고 있다. 남편의 외도를 겪은 돌리는 생계와 아이를 위해 다시 그 제도 속에 편입되어 간신히 삶을 유지한다. 그와 상대적으로 키티는 안정적 행복을 얻지만 어디까지나 남편 레빈이 추구하는 도덕적 이념과 시골 영지를 유지하는 '헌신적인 보조자'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을 때만 그 행복을 허락받는다.


      만약 그녀들에게 그녀들 각각의 공적 영역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안나와 돌리의 경우에는 비록 가정은 지키지 못했지만, 자신의 일이나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을 수 있는 공적 직함과 사회적 영역이 하나라도 더 있었다면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적인 사랑에만 온 세계를 걸어야 했던 안나의 비극도, 모욕을 참아내야 했던 돌리의 희생도 조금은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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