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Review] 지느러미는 싫고 사랑니는 괜찮고? - 지느러미

희생양이 필요한 사회

by 한정아 에디터
2026.07.18 16:28

 

 

영화 <지느러미>를 봤다. 한국 독립 영화가 SF 장르를 어떻게 살려냈을지 궁금했다. 항상 그렇듯 예고편은 보지 않고 스틸컷들만 훑어봤다. 노란색 작업복을 입은 채 손을 들고 있는 여자, 화성처럼 붉은 해안가에 서있는 검은 사람들. 차갑게 서늘한 분위기에 따듯한 빛을 강조하는 색감이 인상적이었다.

   

<지느러미>는 오염된 바다를 막고 있는 4,000km 장벽에 둘러싸인 근미래 통일 대한민국을 담고 있다. 유전적 돌연변이로 지느러미가 생겨나고, 세 개의 발가락으로 살아가는 오메가. 그리고 그런 오메가를 명백히 차별하고 색출해내 노동을 착취하는 인간들. 어딘가 익숙한 이 구도 덕분에 박세영 감독의 독특한 색감 속에서도 영화의 세계에 어렵지 않게 빠져들 수 있었다.

 

 

12.jpg

 

 

보기 편한 영화는 아니에요.

 

하지만 잘 보다 보면 그 너머에 한국의 애잔함을 느낄 수 있으실 거예요.

 

- 박세영 감독 무대인사

 


지독한 한국 영화였다.

 

곳곳에 묻어있는 통일 대한민국의 톤이 흥미로웠다. 물부족국가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내려앉도록 듣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간첩 찾기에 진심이던 우리 부모님 세대가 보셨다면 더욱 감회가 새롭지 않았을까. 항상 내부에 존재하는 적을 경계하고 살아야했던 우리들. 끊임없이 갈라치는 정치 권력 아래 휘둘리는 민중들. 친구와 적의 구분 속에 괴로운 우리들은 그럼에도 물을 아끼기 위해 씻지 않고, 더러운 얼굴을 애국의 상징으로 자랑스럽게 내비춘다.



2.jpg

 

 

미아는 삼촌과 낚시터를 운영한다. “진짜” 낚시를 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영원히 그 순간에 갇혀 꿈을 꾸는 듯 과거를 음미하는 손님들. 그 공간은 무언가 아늑하면서도 기괴하다. 샛노란 미러볼을 돌리자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는 듯 주변이 일렁인다. 푸른 바다를 본 적 있는 사람들에겐, 이 콘크리트 도시들이 얼마나 답답할까. 고향을 잃어버린 그들은 유령과 같은 삶을 산다.


미아 또한 그러하다. 긴 발가락을 잘라내고 인간의 신발을 신은 채 숨어사는 미아는 피아노 페달을 밟아도 밟아도 자꾸만 미끄러진다. 고우에게서 아빠의 지느러미를 넘겨 받을 때 미아의 눈에 비친 적대감은 그 페달에서 왔다. 내가 그렇게 미끄러져도 그렇게 다시 세게 밟았는데, 굳이 나를 이렇게 끌어내려야겠어? 나까지 위험해지는건 왜 생각 못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같은 상처를 받는 동료를 차갑게 내친다.

 

 

10.jpg

 

 

오메가 포획 현장에서 덜덜 떨며 겨우내 발가락 사진만 찍던 막내 수진은 뭔가를 해내고 싶었나보다. 다 죽여버리라는 수진 어머니의 말 속에 어떤 서사가 담겨있을지 모르는 나는 그저 그렇게 넘겨 짚는다. 수진과 미아는 말 한마디 섞어보지 못한 채, 비명소리만 주고 받는다. 허둥지둥 붙잡아본 헤드폰 너머로 들린 미아의 비명소리는 평범했다. 고막이 찢겨나가거나, 쇼크사로 죽어버리기는 커녕 그저 그 나이대 소녀의 서글픈 비명. 뒤늦게 미아 아빠의 지느러미를 쥐어든 수진의 입에서도 같은 소리가 터져나올 뿐이다.


고우가 던진 미아의 시체는 새빨간 바다 위에 배처럼 파도를 넘어넘어 멀리 나아간다. 한순간도 마음 편히 존재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숨어다니던 도시를 미아는 그렇게 떠난다. 죽어서야 드디어 떠난다. 어쩌면 죽고나서야 살아있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죽음이라는 집에 도달하기 위해 떠나는 미아의 모습을 바라본다. 미아를 잡아삼키는 용암같은 새빨간 바다가 뜨겁기보다는 따듯했으면 좋겠다.

 

 


희생양이 필요한 사회


 

IMG_9850.jpeg

 

 

르네 지라르는 인간이 스스로 욕망을 창조해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 주체와 대상의 사이에 언제나 매개자(타인)가 존재하는 욕망의 삼각형. 매개자가 가까운 존재일 때, 둘은 같은 대상을 원하게 된다. 민주주의가 계급을 철폐시키며 우리는 모두 rival이 되어 가까운 거리 속, 훌륭한 모방의 대상이 되어있다. 그 극심한 경쟁(동일성)의 과정에서는 불가피한 폭력이 피어난다.


문화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차이를 회복하기 위해 그리고 동일성에서 오는 폭력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희생양을 설정한다. 공동의 적을 통해 공동체를 결속한다. 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매도함으로서 평온을 찾는다. 그 정화(카타르시스)의 과정으로 질서가 잡히고 차이가 확립된다. 그렇게 차이로 폭력을 해소한다.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은 역사적으로 수없이 반복되어왔다. 고대 그리스에는 매년 기근이나 자연재해에 대한 죄를 몇 사람에게 물어 희생제를 통해 사형에 처하게 했다고 한다. 예수, 마녀사냥, 유대인, 코로나 19 속 아시안 혐오를 걸쳐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 희생양 메커니즘은 정치적 폭력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오메가 찬성 시위와 반대 시위, 그 충돌 속에 껴있는 수진이 아무리 제발 지나갈게요! 지나간다고! 를 외쳐보아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다. 오메가의 지느러미엔 독성이 있대. 소리를 지르면 인간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힐 수 있대. 그게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상관 없다. 믿음의 문제이다. 내부에 심어둔 불안감의 씨앗. 여기에 감염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면 금상첨화이다. 혼란은 프로파간다의 훌륭한 먹이, 불안은 이데올로기의 근원적 배경이니까.

 

어느날 나도 사랑니가 있다는 이유로 사랑니 없는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수도 있다. 사랑니에는 독성이 있대. 물리면 죽는대.



13.jpg

 

 

경쟁 과열 속 열이 바짝 오른 한국 사회는 이 열감을 쏟아부을 대상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영화 <지느러미>는 뜨겁게 달아오른 한국 사회를 세피아 톤 회색 도시로 덮어버리지만, 장벽 너머에는 용암처럼 불타는 바다가 분명히 존재한다. 거친 콘크리트와 떡진 머리카락 사이를 뚫고 나오는 따스한 빛들이 앞다투어 증명한다.

 

아무리 덮어도 덮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억압되어 있는 것들. 새어나오는 것들이 있다. 같음을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이다. 그 사실을 잊은채 아무리 같음의 바깥으로 다름을 추방해도 다름은 계속 계속 돌아온다. 둥근 지구를 돌아 다시 돌아온 미아는 어떤 모습일까. 다름의 중대한 역할이 희생양으로만 소비되는 사회 속, 영화 <지느러미>는 따스한 빛으로 스며들어 우리에게 묻는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