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t by EUNU]
네가 싫어졌다. 그만두고 싶다고 수십, 수백 번 되뇌었다. 억지로 펜을 잡았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복학이라는 좋은 핑계가 생겨 기고를 쉬었다. 한 번쯤은 그리울 거라 생각했는데, 네 잔상조차 잘 떠오르지를 않았다.
점점 파고들기 어려워졌다. 너와의 내일이 그려지지 않았다. 어느새 넌 우선순위 저편으로 밀려났다. 그 사이 내가 너무나 넓은 세계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겠지. 지난 몇 년간 침대 위의 나를 밖으로 꺼내게 되는 것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나는 어제와 내일을 잊었다. 진정으로 좋아한다는 건 그런 거였다. 잘하고 싶어 열심인 것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밤을 지새우는 것도, 칭찬 한마디 듣고 싶어 은근한 관심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떠올렸다.
'머릿속에 스쳐 가는 것을 그대로 가질 수 있을까?'
어떤 의미 부여도, 계획된 선도, 수정 사항도 없는 날것. 지금껏 내가 '미완성'이라고 부르던 것을 꺼내놓았다. 그 순간 펜이 움직였다. 갑갑함도, 의무감도, 두려움도 없이.
이제 애쓰고 싶지 않다. 손이 이끄는 대로 그리는 것, 그림을 망치는 것, 다듬어지지 않은 선을 내버려두는 것. 그런 길도 답이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이건 너와의 이별 선언이다. 나는 너와 작별했다. 연필을 쥐는 게 전부였던, 숨기 급급했던, 좋아하는 것을 아끼기 바빴던 어제들과. 이제는 널 망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안다. 우리의 내일은 완벽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