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보는 동안 몸이 헐벗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하나의 이야기가 세 개의 시점으로 반복되는 동안 나는 그 안에서 처절한 부끄러움을 감각했다. 세 챕터는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여러 시선을 담아냈고 이는 관객의 추한 이면을 들춰내기에 충분했다.
대부분의 인간 내면에는 나와 다른 존재를 탐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깃들어 있다. 그 욕망은 호기심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약간의 오만함 내지는 우월감 또한 내포되어 있다. ‘그래도 내가 저런 괴물보다는 낫지’와 ‘나는 적어도 쟤를 괴물로는 안 본다 내가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지‘라는 모순이 뒤얽힌 마음을 안은 채 영화를 보는 속은 내내 쓰리기만 하다. 알게 모르게 그 오만한 판단에 잠식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만 해도 불편해 죽을 거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이게 끝이 아니다. 우리 내면엔 이러한 탐구 욕망과 동시에 배척 심리도 공존한다. 최악이다. <괴물> 을 감상하는 건 여태껏 외면해 왔던 인간의 추악한 본질을 마주하는 과정 중 일부다. 도대체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배척해 왔는가? 엔딩 크레딧마저 다 사라진 시점에서 그 형체는 오히려 더 뚜렷하고 선명해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세 개의 시점 중 나는 특히 무기노 미나토의 시점에 집중하려고 한다. 앞서 보인 두 시선은 분명 별개의 시선이나 철저히 어른의 시점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내부는 우리 모두가 익히 알다시피 폐쇄적이면서도 폭력적이다. 그 프레임이 아이를 비롯한 소수자를 향했을 때 더욱 가혹하다. 누구나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기준으로 상대방의 말과 행위를 정의 내리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들이 그 사람의 생각의 한계이자 전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하나의 사건이라고 해도 사건을 감각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이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진다. 선생이나 부모,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우위의 위치를 점한 어른들은 흔히 사회에서 ‘정상’이라 일컬어지는 범주로부터 벗어난 아이를 이해하기 어렵다. 온전히 타인의 시선에 머물지 않고서야 절대 들여다볼 수 없는 마음을 우리는 매 순간, 수천수십 번씩 마주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맞닥뜨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무지로 인해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흘려보냈던 걸지도.
이 작품은 ‘알고 보니 우리가 괴물이라 생각하는 게 괴물이 아닌, 그걸 바라보는 우리의 편협한 시선이 괴물을 닮은 게 아닌가’하는 메시지를 제목에서부터 비교적 친절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직접적 화법이 아직은, 여전히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 싶다. 유감스럽게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괴물>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일본의 제도 자체를 비판하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다만 인간 내면의 이야기를 보여줌으로써 '일반적인' 이라는 말, 혹은 '남자가', '남자다운' 이런 표현들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누구도 해를 입히려고 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피해를 보게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일상에 내재한 폭력을 언어화하고 이를 다시 필름 안에 담아내는 행위, 그 안에서 또 다른 폭력을 잉태하지 않기 위해 포개어진 레이어를 수천 번 들여다보는 게 얼마나 세밀함을 요하는 작업인지 이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렇게나 복잡한 인간 내면 심리를 헐뜯는 과정이 어찌 순탄할 수 있겠는가.
예술은 인간의 마음을 산산이 조각내는 과정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