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6월 20일부터 8월 30일까지 공연되는 뮤지컬 <파가니니>는 1840년 숨을 거둔 일명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의 시신이 36년간 무덤에 잠들지 못한 채 떠돌았다는 실화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아들 아킬레가 아버지의 안식을 위해 종교재판 및 법정 다툼을 이어가며 홀로 맞서는 스토리는 표면적으로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천재의 복권에 가까운 듯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어째서 파가니니는 하필 악마여야 했는가', '어째서 파가니니를 향한 낙인이 36년간 시신에까지 따라붙을 수 있었는가'와 같은 질문이 놓여있다.
파우스트 서사는 서양 문화사 안에서 강박적으로 재구성되어 왔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16세기의 요한 게오르크 파우스트 이전에도, 악마와 계약하여 능력을 얻었다는 이야기의 형식은 항상 특정 조건 아래에서 반복되었다. 인간의 능력이 언어로 설명되거나 규정될 수 없는 순간에 악마가 등장하는 것이다. 블루스 기타리스트 로버트 존슨이 미시시피의 어느 교차로에서 악마와 거래했다는 전설이 생겨난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누군가의 연주를 듣고 압도당했으나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말할 수 없을 때. 말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인간이 자주 꺼내 드는 서사가 바로 계약이며, 계약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태여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되는 일종의 자기 충족적 예언으로 기능한다.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입을 모아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과 프란츠 리스트가 연주를 듣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기록을 보면, 파가니니의 연주는 인간이 표현 가능한 감상의 한계 너머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이야기, 그의 바이올린 G현이 목 졸라 죽인 애인의 창자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 등은 모두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소문들은 파가니니를 모함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오래된 언어이기도 했다.
뮤지컬 <파가니니>는 이 구조를 효과적으로 무대 위에 펼쳐놓는다. 콜랭이 루치오 신부에게 파가니니가 악마임에 틀림 없다고 부추기는 장면 역시 단순한 음모가 아니다. 신부가 파가니니를 악마로 믿게 되는 것은 그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파가니니의 음악이 실제로 그의 언어 체계가 수용하고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신의 영역과 악마의 영역이라는 이분법만을 가진 사람 앞에서 신이 아닌 존재가 그토록 압도적인 장면을 연출할 때, 그를 악마로 취급하는 것은 가장 쉬운 선택지다.
그의 음악이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처음부터 말이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한다. 언어가 의미를 붙잡아 해명한다면 음악은 의미가 고정되기 이전의 상태와 명명할 수 없는 감각을 읽어낸다. 몸이 언어보다 먼저 반응하고, 무엇에 감동받았는지 말할 수 없음에도 그것을 다른 누군가와 언어로 공유하고자 할 때 그것은 파가니니 음악의 실체가 아닌, 그저 '악마의 연주'로 번역될 뿐이다.
그렇다면 뮤지컬 속 아킬레의 존재는 이러한 구도 속 어디에 놓이는가. 그는 법정이라는 언어의 장안에서 아버지를 변호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아킬레가 증언을 통해 복원하려는 파가니니는, 언어를 통해서는 끝내 온전히 복원될 수 없는 존재다. 변론이 아무리 정확하고 진실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음악이 아닌 언어를 향한다. 작품이 액자식 구성을 취한 것은 단순한 연출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에 가깝다. 과거에 대한 해명은 현재의 언어로 소환되며, 그 과정에서 불완전한 언어로 인해 무언가가 소실된다. 그러므로 아킬레가 법정에서 싸우는 장면은 사실의 진위를 논하기 이전에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것을 언어로 지키기 위해 투쟁한다는 불가능성이다.
작품 후반부의 '라 캄파넬라' 7분 독주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재판이라는 언어의 장, 한 인간이 악마와 계약을 했다는 서사를 향한 사회제도적 언어가 지배하는 공간 한가운데서 파가니니는 오직 자신의 연주로 자신을 말한다. 언어로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더는 언어로 자신을 해명하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선언이고, 설득을 바라지 않는 유일한 응답이다. 그를 악마로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에게도 끝까지 울려 퍼지는 연주이기에 이는 작품의 백미가 된다.
그가 묘지에 안장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36년이지만, 그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그 어떠한 무해한 언어로 번역되는 일에 실패했다. 마지막까지도 사탄과의 계약을 맺어 쌓은 재산 일체를 교회에 헌납하라는 조건 하에 안장된 것이므로 그의 연주는 그 자체로 이해되고 감상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그의 음악을 언어로 풀어내는 데 실패하는 것은 파가니니가 아직 완전히 땅에 묻혀 잠들지는 않았다는 뜻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