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내게 <어린 왕자> 같은 작품이다. <어린 왕자>를 어렸을 때 읽는 것과 어른이 되어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르듯, <빌리 엘리어트> 역시 어렸을 때의 나와 성인이 된 내가 느끼는 감상의 결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나는 막연히 빌리의 편에 서서 그의 꿈을 가로막는 '나쁜' 어른들이 안타고니스트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다시 이 영화를 재생했을 때는 오히려 어른들이 주인공 같다는 생각을 했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빌리의 재능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미래를 위해 캄캄한 광산으로 함께 내려가던 재키와 토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가슴이 저릿하다. 그 장면에서는 오히려 빌리가 안타고니스트가 아닐까 하는 과도한 해석도 하게 된다. 안 그래도 힘든 생활 중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빌리를 지원하지 않을 수 없는 배경 자체가 그의 가족들에게 있어서 거대한 안타고니스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순한 성장 영화라고만 볼 수 없는 <빌리 엘리어트>는 당대 영국 사회의 복잡한 노동 구조와 사회적 시선이 부여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문제, 그리고 계층에 따라 아이들이 향유하는 놀이가 달라지는 양상 등을 다루는 다면적인 영화다.
"영국 북동부 더럼 탄전, 1984년"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오프닝에서 이 건조한 자막 하나만으로 작품의 사회적, 시대적 배경을 명확히 보여준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영국 북동부 더럼 탄전이며 시간적 배경은 1984년, 즉 마가렛 대처 총리의 집권기다. 왜 하필 1984년이고, 왜 하필 탄전이며, 또 왜 하필 마가렛 대처의 시대였을까. 이 조건들은 그 자체로 <빌리 엘리어트>의 거대한 시공간적 배경이자 무대가 된다.
해당 작품은 대처 정부 시절 자행된 과도한 민영화 정책과 노동조합 탄압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조명한다. 정부에 맞서는 탄광 노동자인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의 투쟁은 처절하다. 영화는 이토록 척박하고 암울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빌리라는 '미래적 존재'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가장 찬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사회가 부여한 여성성과 남성성
이 작품을 관통하는 굵직한 줄기 중 하나는 바로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흥미롭게도 주인공인 빌리조차 발레는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며 남자한텐 어울리지 않는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재키와 토니의 격렬한 반대는 물론이고, 교습소에서 피아노를 치는 반주자마저 빌리가 발레를 하는 것을 기이하게 바라본다. 영화 곳곳에는 이처럼 빌리가 온전히 춤을 즐기지 못하게 만드는 차별적인 시선이 촘촘하게 깔려 있다.
영화 초반부, 체육관 문 앞에 서서 마이클과 대화하는 빌리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화면 오른편에 걸린 명패를 볼 수 있다. [EVERINGTON BOYS CLUB - SECOND FLOOR] 즉, "에버링턴 소년 클럽"이라는 것이다. 이미 이 명패에서부터 복싱은 오직 남성의 것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드러난다. 하지만 함께 발레를 배우는 데비는 빌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자들도 발레를 많이 하며, '웨인 슬립'이라는 무용수는 운동선수만큼 단련이 돼 있다고 말이다.

처음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던 빌리였지만, 점차 발레의 매력에 매료되면서 스스로 편견을 깨부수게 된다. 춤을 춘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들킨 후에도 빌리는 발레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남자들은 축구나 권투, 레슬링을 해야 된다는 아버지의 가치관 앞에, 빌리는 데비의 말을 거울처럼 반사해 낸다. 발레 무용수는 운동선수만큼 단단하다고. 웨인 슬립을 보라고 말이다. 기성세대의 시선을 그대로 답습하던 소년이 마침내 그 틀을 부수고 자신만의 시야를 획득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빌리라는 소년을 통해 당대 영국 사회를 지배하던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편견을 깨부순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어린 빌리와 어른들 간의 태도 차이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윌킨슨 부인과 빌리의 할머니를 제외한 대다수의 어른들은 빌리가 발레를 배우는 건 소위 '미친 짓'이라며 배척한다. 하지만 빌리는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춤을 출 뿐이라며 맞선다. 어른들은 이미 사회가 주입한 시각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 그 궤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용납하지 못하지만, 아직 11살짜리 아이인 빌리는 그 견고한 벽 앞에서도 비교적 자유롭다. 어른들에게 물려받은 전통에 순응하던 아이는, 춤이라는 방식을 통해 점점 자신만의 시각을 갖춘 주체로 성장한다.
계층에 따라 나뉘는 문화적 차이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뿐만이 아니다. 견고하게 뿌리내린 사회적 계층의 한계 역시 끝까지 빌리를 괴롭히는 요소로 작용한다. 빌리는 전형적인 노동자 계층에서 자랐다. 재키와 토니는 정부의 탄광 정책에 반발하며 파업 투쟁의 최전선에 선 광부들이다. 작품 내내 파업 노동자들이 경찰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는 장면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동료들을 향해 '배신자'라고 울부짖는 탄광 노동자들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빌리가 발레를 배우는 평화로운 장면과 노동자들이 반역자라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 교차편집되는 연출은, 이러한 노동자 계층에서 자란 빌리는 현실의 무게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순 없다는 절망감마저 안겨준다.

관련 연구인 '조성식, 황미경(2011)'의 논문에 따르면,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노동자 계층의 문화를 반영하는 활동으로 권투가 등장하는데, 권투는 돈과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는 스포츠 활동으로 노동자 계층의 문화를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그러나 발레는 소위 '고급문화'로 표현이 된다. 이러한 극명한 대비는 발레 교사 윌킨슨과 아버지 재키의 대립 장면에서 고스란히 표출된다. 윌킨슨이 빌리를 로열 발레 스쿨 오디션에 데려가려 하자, 재키는 지금 농담하냐고 우리 상황이 어떤지는 아냐며 반문한다. "더구나 당신에게 갖다 바칠 돈도 없어요."
하지만 빌리가 성역할에 대한 편견을 부쉈듯이, 오디션 합격을 통해 사회적 계층의 차이까지 뛰어넘게 된다. 물론 이는 빌리 혼자서 쟁취한 성공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가족들의 처절한 헌신이 있었다. 내가 이 영화의 백미로 꼽는 장면도 바로 그와 관련된 장면이다. 내내 발레를 강경하게 반대하던 재키가 크리스마스 당일, 체육관에서 빌리의 춤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는 장면 말이다. 그 길로 재키는 한달음에 윌킨슨의 집에 찾아가 묻는다. "얼마나 들어요?" 그 짧은 한마디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빌리를 전적으로 지원해 주기로 결심했음을 알 수 있다.
땔감이 없어 아내의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고 초라한 식사를 하던 도중 울음을 터트린 재키에게 빌리의 춤은 마치 기적 같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을 것이다. 결국 재키는 그날 이후 강경한 파업 노동자의 입장을 포기하고 현실에 타협하며 버스에 올라탄다. 그런 재키를 발견한 토니가 달려들어 이러면 안 된다고 소리치지만, 재키는 울부짖는다. 우리 꼴을 보라고. 그 애 마저 망칠 순 없다고. 네 동생 빌리는 누구보다 대성할 수 있고, 이제 겨우 11살인 아이지만 우린 끝장이라고. 그 애에게 기회라도 주자고...
이 장면에서 나는 세대 간에 주어진 시간의 격차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가능성이 무한한 빌리와 달리, 재키와 토니는 더 이상 다른 내일을 꿈꿀 수 없는 어른이 돼 버린 걸까. 어른이 된 모든 이들은 자신의 희망을 오롯이 아이에게 걸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날 이후 재키는 아내의 유품인 목걸이 등을 전당포에 맡기며 기어코 돈을 마련한다. 영화 후반부에 빌리가 런던으로 떠나는 버스에 오른 뒤 나오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파업에 실패한 광부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두운 갱도 밑으로 가라앉는 장면 말이다. 이 교차를 통해 우리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빌리에게서는 예술을 통한 희망을, 광부들에게서는 사회적 억압에 패배하고 만 절망을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말부에서 더 큰 희망을 그린다. 재키와 토니가 밑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여준 뒤,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모습을 나란히 비추고, 마침내 무대 위에서 백조처럼 날아오르는 성인 빌리의 이미지를 제시하며 끝을 맺기 때문이다. 아무리 견고한 계층 간의 벽이라도 언젠가는 깰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빌리가 오디션을 보기 위해 런던으로 떠나던 날, 동행했던 아빠와의 대화를 떠올려 보자. 런던이 어떤 곳이냐는 빌리의 물음에 재키는 이렇게 답한다. "나도 모른다. 더럼을 떠나 본 적이 없다. (...) 내가 런던엔 왜 가겠니? (...) 런던엔 광산이 없잖니." 재키는 더럼에서 나고 자라 그곳을 평생 떠나 본 적도 없는 인물이다. 그는 마치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희생을 딛고 도약한 빌리의 비상은 결국 그 좁은 광산을 넘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계급적 해방을 완성해 낸다.
소년에게 주어진 미래
서두에서도 밝혔듯, <빌리 엘리어트>는 볼 때마다 그 감상이 달라지는 작품이다. 어렸을 적 빌리와 비슷한 나잇대에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단순히 신나는 음악과 화려한 춤, 그리고 나쁜 어른들에 대한 반발심을 느꼈고 무조건 빌리의 편에 서서 상황을 받아들였다. 두 번째로 작품을 마주한 청소년기에도 계속 빌리의 상황에 감정이입을 해서 바라보다가, 마지막 순간 아빠와 형이 탄광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에 이르러서야 펑펑 울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영화를 본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울었다. 이제는 비상하는 소년이 아닌, '포기'가 익숙해진 어른들의 입장에 서서 영화를 보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거듭해서 '아이들의 미래'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미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어른들의 그림자 역시 영화 한편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아이들에게는 미래가 충분하지만, 더 이상 허락된 미래가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어른들의 뒷모습은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러나 빌리의 눈부신 도약은 결코 혼자만의 비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두운 지하로 가라앉은 이들이 온몸으로 밀어 올려준, 서글픈 기적이었다.
[참고문헌]
조성식, 황미경, 「인문,사회과학편 : 영화에서 나타난 춤의 사회저항적 담론 분석 - <빌리 엘리어트>를 중심으로」, 『한국체육학회지』 50권 5호, 한국체육학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