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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하는 버블 경제

 

<큐어>, <회로> 등 스산한 공포·스릴러 영화의 거장으로 알려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2008년 가정을 무대로 한 홈 드라마 <도쿄 소나타>를 선보였을 때,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다. 그러나 베일을 벗은 영화는 그 어떤 호러 영화보다 섬뜩한 현대 사회의 공포를 담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장기 침체(잃어버린 10년)가 고착화된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인한 세계 금융위기까지 덮친 시기였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 경제적 붕괴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하게 해체될 수 있는지, 시스템의 붕괴가 어떻게 개인의 정신과 가정을 잠식하는지에 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카메라를 든다.

 

그는 가장 일상적이고 안전해야 할 집이라는 공간을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절망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으며 현대인의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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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영화의 줄거리는 지독하리만치 차분하고 평범한 한 가정의 식탁에서 출발한다. 가부장적 질서의 정점에 서 있던 아버지 류헤이는 어느 날 회사에서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는다. 하지만 가장으로서의 자존심과 권위를 잃고 싶지 않았던 그는 실직을 숨긴 채 매일 아침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 시늉을 하며, 무료 급식소를 전전하고 공원 벤치에서 시간을 보낸다.

 

여기서 침묵은 보이지 않는 권위였고, 선이자 경계였다. 어머니 메구미는 남편의 거짓말을 눈치채고도 모른 척하며 무력감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고, 큰아들 타카시는 미군에 자원입대해 전쟁터로 떠나려 한다. 막내 켄지는 부모 몰래 피아노를 배우며 가족의 눈을 피한다. 서로의 진실을 모른 척하는 이 서늘한 침묵만이 위태로운 평화를 지탱하는 유일한 기둥이다. 하지만 이 경계는 영원할 수 없다.

 

각자가 숨겨온 비밀과 외로움이 국경을 넘듯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기 시작했을 때 견고했던 침묵은 비명과 함께 깨지고 가족의 삶에는 파동이 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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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길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가족들이 각자의 결핍을 안고 뿔뿔이 흩어지는 소동극은 흡사 잔혹극과 같은 긴장감을 자아낸다. 감독은 일상의 붕괴를 자신만의 장기인 스릴러적인 문법으로 그려내며 인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아버지는 도둑질을 하다가 절도범으로 몰려 밤거리를 질주하고, 어머니는 집에 든 강도에게 인질로 잡혀 외딴 바닷가 폐가로 향하며, 막내 켄지는 무임승차를 하다 유치장에 갇힌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이게 모두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현실이 감옥 같아서, 혹은 죄책감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그들은 끊임없이 달리고 도망치며 숨어든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달려서 도착한 곳은 더 이상 길이 없는 막다른 곳이었고, 그곳은 역설적이게도 진짜 감옥이었다. 물리적인 창살이 있든 없든, 그들이 마주한 어둠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음을 선고하는 종착역처럼 보였다.

 

 

 

일출

 

그러나 영화는 이 절망의 끝에서 가장 아름다운 반전을 보여준다. 감옥 안에 있을 때는 그토록 어둡고 쓸쓸했는데, 막다른 길이라 생각했던 그곳에서 문을 열고 나오니 태양이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바닷가에서 눈을 뜬 어머니도, 유치장을 나온 켄지도, 쓰레기 더미에서 기어 나온 아버지도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비로소 서로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았고, 외면했던 주변의 풍경을 마주한다.

 

사람들은 흔히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가족들은 낙원을 찾기 위해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기 안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 혹은 무너져가는 자아를 붙들기 위해 본능적으로 달렸을 뿐이다. 달려서 도착한 곳에 감옥이 있었고, 그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사실 새로운 시작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감옥 너머에는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고, 그 길 위에는 그들을 공평하게 비추는 태양 빛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겨우 집으로 돌아온 이들이 마주한 것은 다시 마주해야 할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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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소나타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켄지의 피아노 콩쿠르 장면은 이 모든 혼돈과 상처를 정화한다. 켄지가 연주하는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은 밤을 노래하는 곡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마치 일렁이는 태양 빛을 연상시키는 찬란한 일출처럼 들린다.

 

켄지의 손끝에서 흐르는 선율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음악은 아버지가 숨겼던 비겁함도, 어머니가 겪었던 무력감도, 가족을 갈랐던 침묵도 모두 끌어안으며 일출처럼 떠오른다. 그런데 이 연주는 단순히 맑고 투명하지만은 않다. 밝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뿌연 안개가 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왜 그런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이 바로 삶 자체였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개인 하늘이 아니라, 여전히 불투명하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기어코 떠오르는 아침 해. 그것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켄지의 연주는 일출처럼 밝았지만 삶처럼 뿌연 온도를 품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흐릿한 일출을 보려고 모여들었고, 영화는 비로소 낙원이 아닌 '삶'에 안착하며 끝을 맺는다.

 

삶은 켄지의 연주처럼 눈부시면서도 뿌옇다. 그 뿌연 안개 너머로 태양은 떠오르고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켄지의 선율이 준 위로는 낙원이 있다는 환상이 아니라 이 흐릿한 안개 속에서도 계속해서 연주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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